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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6.06 18:50 수정 : 2014.06.08 09:42

방송인 김상중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그가 처음 데뷔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냉철한 이미지는 아니었다. 커리어 초반 특유의 강직하고 날카로운 표정으로 윤봉길 의사(<님이여>, 문화방송(MBC)·1992)나 김구 선생(<김구>, 한국방송(KBS)·1995)을 연기하긴 했지만, 그래도 부드럽고 사람 좋은 역할로 출연한 일도 적지 않았다. 아이들을 자상하게 대하는 중학교 체육 선생님(<사춘기>, 문화방송·1993)이라거나, 목욕탕 집 맏손자사위(<목욕탕집 남자들>, 한국방송·1995), 혹은 작은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며 조용히 살아가는 중년(영화 <산책>, 2000) 같은 배역을 소화하며, 보는 이들 곁에 친근하게 다가오는 모습도 심심찮게 보여줬다. 그런데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브라운관 위의 그는 이빨 하나 들어갈 틈도 없는 냉철함의 현신이 되어버렸다.

‘그것이 알고 싶다’ 진행자로 7년
풍성한 저음·정확한 발성에다
때론 휘몰아치는 내레이션으로
시대의 모순·병폐 날카롭게 고발
수차례 예능 섭외까지 거절해가며
냉철하되 신뢰 가는 이미지 쌓아

아내의 범죄 사실을 숨기고 피도 눈물도 없이 대권을 향해 돌진하는 대선후보(<추적자>, 에스비에스(SBS)·2012)에 이어, ‘대한민국 3대 권력기구’라 손꼽히는 거대 로펌의 대표(<개과천선>, 문화방송·2014)가 된 그는 서늘하고도 미끈한 목소리로 시청자의 귓전에 속삭인다. “무죄라는 건 말이야,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야. 죄가 있는 걸 증명하지 못했다는 말이지.” 간만에 착한 역할을 맡아도 일곱 명의 아이들을 거둔 천사 같은 사내(<황금 무지개>, 문화방송·2013) 역할은 크게 화제가 되지 않는 반면, 아들을 살리기 위해선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죽음을 선택한 냉철한 의사(<닥터 이방인>, 에스비에스·2014) 역할은 한 회 분량만 특별 출연해도 인구에 회자된다. 대체 김상중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필경 그것은 토요일 밤마다 모두를 티브이 앞으로 불러 앉히는 탐사 보도 프로그램 에스비에스 <그것이 알고 싶다> 때문일 것이다. 때로는 소름 끼치는 공포물 같다가도 다음 순간이면 추리물이 되어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들며 보는 이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사회 고발물이 되기도 하는 이 탁월한 프로그램에서 김상중은 내레이터이자 탐정이 된다. 2008년부터 햇수로 7년, 역대 진행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그것이 알고 싶다>를 지키고 있는 김상중은 프로그램의 상징과 같은 존재가 되었고, 원래도 지적이고 강직하던 그의 이미지 위엔 자연스레 ‘냉철함’과 ‘서늘함’, 그리고 ‘명탐정’이란 레이어가 겹쳐졌다. 언젠가부터 그를 보면 뭔가 진실을 파헤쳐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건, 괜한 착각이 아닌 게다.

후발 주자들은 김상중 특유의 톤을 참고하는 티가 역력하다. 최근엔 한국방송 파일럿 프로그램 <공소시효>(2014)에서 김상경이, 종합편성채널 채널에이(A)의 모큐멘터리 프로그램 <싸인>(2014)에서 류승수가 김상중의 아성에 도전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아버지 친구가 운영하던 극장을 들락거리고, 중학생 때 일본어 판 <스크린>과 <로드쇼>를 정기구독 했으며, 고등학생 때 연극제에서 상을 받으며 진로까지 법대에서 연극영화과로 바꿨던, 평생 영화와 연기밖에 모르던 한 사내의 대표작이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탐사 보도 프로그램인 이 기묘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우리는 잠시 시간을 되돌려볼 필요가 있다. 2010년대 초, 젊은 제작진으로 교체된 <그것이 알고 싶다>는 초창기 미스터리 콘셉트로 돌아가되, 시청자들로 하여금 더 깊게 몰입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세련되게 다듬어야 한다는 문제 의식을 가지고 프로그램을 개편하기 시작했다. 스토리텔링은 사건이 일어나던 시점으로 돌아가 사건을 충실히 재현하며 긴장감을 높이고,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은 과학 수사 기법과 컴퓨터 그래픽 시뮬레이션 등을 활용해 몰입도를 높였다. 마을에서 연기처럼 사라진 석공의 실종사건을 추적한 ‘이백리 실종 미스터리’ 편은 거대 세트에 읍내 도면을 그대로 그려 흡사 영화 <도그빌>(2003)과 같은 연출을 선보였고, ‘청테이프 살인사건’ 편에선 범행 당시를 재현하고 있는 범인 역할의 재연 연기자 뒤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김상중을 세우며 시청자들을 전율하게 했다.

이런 프로그램의 체질 변화를 김상중은 훌륭한 연기로 뒷받침해주었다. 김상중은 풍성한 저음과 정확한 발성, 때로는 비장하게, 때론 감정을 휘몰아치는 내레이션으로 스토리텔링의 긴장감을 팽팽하게 조였다. 진실을 갈구하는 탐정의 눈빛으로 “한번, 사건이 일어나던 순간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라거나, “사건의 실체를 제대로 알기 위해, 아무래도 김씨를 만나봐야겠습니다”와 같은 멘트를 던지는 김상중은 보는 이들을 확 집중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이 과정에서 김상중이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면모 중 ‘냉철하고 지적인’ 부분이 압도적으로 부각되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내 남자의 여자>(에스비에스·2007) 속 “감자 좀 쪄줄래?”가 대표적인 명대사였던 배우가, “그런데 말입니다”를 최고 명대사로 남긴 ‘중년 탐정’으로, 나아가 우리 시대의 모순과 병폐를 목격하고 고발하는 시대의 검사로 거듭난 것이다.

이 신뢰는 단순히 훌륭한 연기력으로만 쌓아 올린 것은 아니다. 김상중은 <그것이 알고 싶다>를 진행하기 위해 필요한 진지한 이미지에 해가 갈 것을 염려해 예능 프로그램의 섭외를 수차례 거절한 바 있고, 시사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특정 정파에 치우치면 시청자들의 신뢰가 깨질 것이라며 정파성의 한계를 띤 종합편성채널에 출연하지 않겠다는 신조를 밝히기도 했다. 배우가 7년이나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면 어떤 한 이미지로 굳어질 것을 알면서도,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진실되게 전해드리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당분간 그런 역할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에 이르면, 그가 진실과 신뢰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헌신적으로 <그것이 알고 싶다>에 임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알고 싶다>만 김상중에게 빚을 진 것이 아니다. 김상중 또한 프로그램의 진화와 함께 진실을 추적하는 남자, 냉철하고 지적인 남자, 그리고 신뢰할 수 있고 신뢰하고 싶은 남자로서의 이미지를 꾸준히 쌓아 올렸다. 그리고 그런 김상중의 이미지를, 명석한 창작자들은 놓치지 않고 활용했다. <닥터 이방인>에서 김상중은 아들 박훈(이종석)을 지키기 위해 침착하고 냉정하게 상황을 설계하고, 마지막 순간 아들의 망명을 위해 자신이 죽어야 하는 상황이 오자 주저없이 목숨을 버리는 냉철한 의사 박철을 연기했다. 한 회에 그친 특별출연이었지만, 그가 남긴 잔상은 시청자들을 사로잡아 충성도 높은 팬으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신뢰의 상징’이라는 점이 재미있는 건, 그 신뢰를 배반하는 순간 보는 이들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점이다. 김상중이 연기하는 악역은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위력을 발휘한다. 자신의 집권 플랜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가차없이 제거하며 돌진하는 <추적자>의 강동윤은 분명 악당이지만, 동시에 그가 하는 대중연설이나 그가 이야기하는 국가의 미래상을 보며 시청자들은 그를 미워하는 동시에 그에게 설득이 되는 양가적 감정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행보는 최신작 <개과천선>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유능하고 철두철미한 로펌 대표 차영우는 그 매끈한 일처리로 보는 이들을 매료시키는 동시에, 정재계에 손길을 뻗어 자신이 의도한 바대로 정국을 요리하는 악마적인 면모를 보여주며 극의 긴장감을 팽팽히 조이는 것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지금은 시행착오를 겪는 시기이다. 문화 소비자들이 ‘김상중은 어떤 배우이다’라는 것을 떠올리려면 시간이 좀더 필요한 것 같으며, 앞으로의 과제인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이 역은 김상중이라는 배우가 아니면 할 수 없다는 시점이 오지 않을까?” 1997년 영화전문지 <키노>와의 인터뷰에서, 김상중은 관객들이 자신을 어떤 배우로 보았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17년이 지난 지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는 안다. 동시대 배우 중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냉철함과 날카로움의 소유자. 우리 편이었을 때는 더없이 신뢰하고 기댈 수 있지만, 적이었을 때는 꿈에서라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악당. 지금 이 순간, 김상중은 철두철미함과 날카로움, 신뢰를 상징하는 우리 시대의 아이콘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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