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옥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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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벌써 몇년째 ‘20대 여배우 기근’이라는 말이 도는지 모르겠다. 당장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20대 여배우 기근’이란 키워드를 입력하면 10여년 전 기사부터 지난주에 나온 기사까지 여배우 기근을 이야기하는 기사들이 꼬리에 꼬리를 잇는다. 그럼 지금 활동하고 있는 30대 여배우들은 20대 때는 배우가 아니면 무엇이었으며, 저 많은 20대 여배우들은 다 뭔가 싶은 생각이 들 때면 나는 사람의 게으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눈앞에 뻔히 괜찮은 배우가 있음에도 굳이 발견하고 싶거나 재조명하고 싶지 않은, 어디선가 눈을 확 사로잡아줄 만한 완성형 뮤즈가 알아서 등장해주기만을 기다리는 게으른 평자들이 만들어낸 상상 속의 기근. 혹은 자신이 좋아하는 여배우에게 필요 이상의 상찬을 보내기 위해 멀쩡히 존재하는 20대 여배우 군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20대 여배우 기근 속에 등장한 보석 같은 여배우’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의도가 뻔한 마케팅. 저격수·뱀파이어 등 독특한 인물위태롭고 청순하며 도발적으로 빚어
김운경 작가 ‘유나의 거리’에선
소매치기 ‘삼류’역할 존재감 뽐내
훌륭한 여배우 눈앞에 두고도
‘20대 여배우 기근’ 타령 한심해 특히나 최근 제이티비시(JTBC) 월화드라마 <유나의 거리>에 출연 중인 김옥빈(사진)에 대한 미디어의 무관심은, 조금 의아할 지경이다. 전작들에서 저격수(<고지전>, 2011), 뱀파이어(<박쥐>, 2009), 기생(<1724 기방난동사건>, 2008),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다세포소녀>, 2006) 등으로 분하며 다소 일상적이지 않은 인물들을 연기해온 김옥빈이, 비록 소매치기 전과 3범의 ‘삼류’ 인생이긴 하지만 어디에선가 마주쳤을 법한 인물을 연기하는 건 분명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언제 잡혀갈지 모른다는 직업적 두려움과, 혼자 힘으로 입 벌린 아귀 같은 세상과 맞서는 피로감,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깊은 내면을 보여줘선 안 된다는 자기방어로 똘똘 뭉친 위태로운 여인 강유나를 연기하는 김옥빈은 언제나처럼 불온하면서도 반짝거림을 잃지 않는다. 주연이 혼자 빛을 보기엔 구조적으로 어려운 김운경 작가 특유의 민중군상극 속에서도 김옥빈은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에 비하면 김옥빈의 연기를 칭찬하는 이나, <유나의 거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의 수는 좀 많이 적은 편이다. 언론 입장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데뷔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슈퍼스타도 아닌 여배우를 새삼스레 상찬하는 건 별로 구미가 당기는 일은 아니리라. 대중이 이미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 쉽게 독자를 끌어모으는 쪽이 편하고, 그게 아니라면 아예 생짜 신인을 대중 앞에 들이밀며 “이 사람이 여배우 기근을 끝장낼 것이다”라고 말하는 쪽이 조금 더 그럴싸해 보이니까. <유나의 거리>의 시청률은 2% 안팎이고, 김옥빈의 최근 작인 한국방송(KBS) <칼과 꽃>은 첫 회에서 기록한 7%가 최고 시청률일 정도로 상업적인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확실히 언론이 진지하게 기사를 계속 생산할 만큼 ‘핫’한 아이템은 아니다. 나처럼 내가 쓴 글이 얼마나 잘 팔리는지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외부 필자면 모를까, 클릭 수에 따라 상여금이 나온다는 연예 매체 기자들의 입장을 뭉뚱그려 ‘게으름’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긴 하다. 하지만 이렇게 결론을 내버리면, 우리는 우리 시대에 근사한 연기를 보여주는 여배우들을 단순히 흥행과 인지도로만 평가하고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보통 이 인지도는, 불행하게도 그들이 얼마나 ‘대상화’되느냐에 따라 결정되곤 한다. 이 배우가 얼마나 예쁜가, 몸매가 얼마나 좋으며, 시상식장엔 어떤 드레스를 입고 나왔고, 최근 잡지 화보에선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는가. 사람들은 ‘절대 동안’, ‘꿀피부’, ‘베이글녀’ 등의 수식어를 동원해가며, 여배우들을 대중이 눈으로 즐길 수 있는 ‘객체’의 자리에 가져다 놓는다. 남자 배우들이 대체로 그들이 주체가 되어 선보인 연기를 통해 평가받는 동안, 여배우들은 자신의 작품 활동과는 무관한 것으로 기사에 오르락내리락해야 한다. <유나의 거리>에 함께 출연중인 배우 신소율이 “자신이 과거 속옷 화보를 찍은 것은 하나도 창피한 일이 아니고 소중한 경력이나, 그와 무관한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기사에까지 그때 찍은 사진을 사용하는 건 불편하다”고 이야기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김옥빈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2006년 엠넷(Mnet)의 연말음악축제 엠넷-케이엠티브이 뮤직 페스티벌(MKMF)의 페스티벌 레이디로 선정된 김옥빈은 바이럴 영상에서 짧은 원피스를 입고 리한나의 ‘렛 미’에 맞춰 섹시 댄스를 췄다. 아마 같은 해 개봉했던 영화 <다세포 소녀>에서 김옥빈이 섹시 댄스를 췄던 게 화제가 되었으니, 그 여파를 최대한 활용해보자는 심산이었으리라. 페스티벌에 어떤 가수들이 나와서 어떤 무대를 펼치는지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오로지 춤을 추는 김옥빈의 육체에만 집중한 그 기괴한 영상은 확실히 널리 퍼지긴 했다. 덕분에 우린 아직도 구글에서 ‘김옥빈’을 검색하면 제일 처음 등장하는 동영상으로 그의 연기 대신 그의 춤을 접하게 되었다. 오로지 아슬아슬한 옷을 입고 골반을 흔드는 김옥빈의 육체가 얼마나 섹시하게 보이는가만이 화제의 초점이었고, 그 동영상을 언급하는 기사는 잊혀질 만하면 “인터넷에서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는 핑계를 달고 다시 튀어나온다. 물론 배우의 육체는 배우의 연기와 떼어놓기 어려운 요소이긴 하다. 김옥빈 특유의 큰 눈과 냉소적으로 올라가는 입꼬리, 시니컬한 무표정은 배우가 지닌 본연의 여성스러운 얼굴과 흥미로운 불협화음을 빚으며 ‘위태롭고 불온하며, 청순하지만 도발적인’ 캐릭터를 빚어내는 데 큰 도움을 주니까. 영화 <박쥐>에서 평생을 새장 속에 갇힌 것처럼 살다가 갑자기 얻게 된 자유를 만끽하는 악마적 매력의 태주가 그랬고, 피도 눈물도 없는 저격수인 것 같지만 그 속내는 그저 여린 구석이 많았던 <고지전>의 저격수 ‘2초’ 태경이 그랬다. 창만(이희준)을 한눈에 반하게 만들 만큼 예쁘고 여리고 반짝거리지만, 동시에 삶의 매 순간이 궁지라서 체념과 울분을 기본으로 탑재하고 사는 <유나의 거리> 속 유나가 그렇듯이 말이다. 그러나 연기를 선보이는 ‘주체’로서 부리는 김옥빈의 육체는, 동영상 속에서 춤을 추며 즉물적인 호기심을 자아내는 ‘객체’로 전시된 김옥빈의 육체보다는 조명을 덜 받았다. 한국 사회가 젊은 여자 연예인을 소비하는 방식의 폭력이 여기에 있다. 사태를 더 악화시킨 것은 그가 과거 문화방송(MBC) 토크쇼 <놀러와>에 나와서 뱉은 한마디였다. “남자가 분위기를 잡으려고 하거나 이벤트를 하기 위해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밥을 사고는, 계산할 때 할인카드를 내밀면 분위기가 깨지고 실망스럽다”라는 한마디는 각설이 타령처럼 죽지도 않고 도로 기어올라왔다.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엔 분명 덜 정제된 발언이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내가 영화를 보여줄 테니 그쪽은 밥을 사라”라는 말을 듣고 데이트 장소에 나갔다가, 상대가 쌓아둔 극장 포인트로 영화 티켓을 사고는 자신에게 1인당 1만2000원에 육박하는 수제 햄버거 세트 메뉴를 사달라고 말하는 진상을 경험한 젊은 여성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할인카드가 분위기를 깬다는 수준의 발언이 그렇게까지 마녀사냥을 당해 마땅한지 알 수 없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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