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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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난리다. 아니, 난리도 아니다. 소녀시대의 리더 태연과 엑소(EXO)의 멤버 백현이 연애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지고 나서, 인터넷엔 한바탕 파란이 몰아쳤다. 겉보기엔 한풀 꺾이고 잠잠해진 듯하지만, 수면 아래에선 아직도 수많은 팬들이 배신감에 몸을 파르르 떨고 있다. 사태를 멀리서 지켜보는 사람들이야 “고작 아이돌이 연애하는 거 가지고 뭘 그렇게 괴로워하나. 그렇다고 그 사람이 너하고 사귀던 것도 아니었는데”라고 말하고 넘길 수 있을지 모르나, 한 꺼풀 벗겨보면 사태는 조금 더 복잡하다. 엑소의 여성 팬들이 태연에게 분개하거나, 소녀시대의 남성 팬들이 백현에게 분노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소녀시대의 여성 팬들이 태연에게 분개하는 것이 가장 규모가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올해 초부터 터져 나왔던 소녀시대 내 다른 멤버들의 열애설 때와는 팬덤 내의 공기가 조금 다르다.
엑소 멤버 백현과 열애로 떠들썩 소녀시대 팬들 분노가 큰 이유는
태연이 SNS서 팬들 위로하며
동시에 연인과 암호 주고받아
‘아이돌 판타지’라는 계약관계 깬탓
‘완벽하지 못한 인간’으로서 태연을
끌어안고 팬으로 남는 건
오롯이 개인의 선택이겠지만
그런 사랑도 가능하지 않을까 “도대체 태연의 연애에만 유독 더 냉정한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팬들의 대답은 이렇다. “다른 멤버들이 연애를 한다는 기사가 터져서 팬들이 웅성웅성대고 있을 때 태연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상심한 팬들을 위로해왔다. 그때도 이미 태연은 연애를 하고 있던 상태고, 팬들 또한 그가 연인과 비밀스러운 암호를 사용해가며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아홉 명 중 네 명이 연애를 하고 있는 상태이니 거기서 한 명 정도 더 연애를 한다고 무슨 큰 상심이 있겠나. 멤버들도 사람이고 20대 중반인데, 연애 못 하게 발목을 잡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연애를 할 때 하더라도, 팬들이 선물해준 머그컵 사진을 올리면서 거기에 연인과의 암호를 숨긴다거나 하는 식의 기만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말하자면 사람들이 넘겨짚는 대로 ‘유사연애’가 깨진 것이 문제가 아니라, 팬과 아이돌 사이의 최소한의 신뢰가 깨졌다는 것이 소녀시대 여성 팬들을 분노케 하는 지점인 셈이다. 태연 본인이 나서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올라온, 세간에선 두 사람 사이의 암호라 여겨지는 부분들이) 절대 그런 의도가 아니었고, 그런 목적이 아니었다”고 해명해도, 한번 상심한 팬들의 마음이 쉽게 풀리진 않는 듯 보인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스물여섯의 여성이 그 사랑을 주변에 들키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누구든 저지를 수 있는 실수고, 우리는 종종 그런 시행착오를 통해 성장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렇게 이해받기엔 태연은 너무 널리 알려져 있고 너무 많은 이들로부터 배타적인 사랑을 받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자연인으로서의 ‘김태연’이 저지를 수 있는 실수는, 아이돌로서 팬과의 계약관계를 지켜야 하는 ‘소녀시대 리더 태연’에겐 비판의 이유가 된다. 맞다. 나는 방금 그것을 ‘계약관계’라고 이야기했다. 아이돌 산업의 본질적인 원리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내가 너에게 돈과 시간과 애정을 투자할 테니, 넌 내게 쉽게 깨지지 않는 판타지를 줘”다. 단순히 춤이나 노래로 받는 사랑에만 국한한다면, 아이돌들이 받는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인기를 설명할 수 없다. 팬들은 노래나 춤과 같은 세부적인 재능의 매력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입는 의상, 그들의 외모, 그들의 말과 행동, 춤, 노래 등이 모여 빚어내는 총체로서의 판타지를 구매한다. 왜, 에이치오티(H.O.T.)의 리더였던 문희준은 과거 팬들이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던 ‘신비주의’ 이미지를 깨지 않기 위해 화장실 가는 것조차 참았다고 하지 않나. 물론 팬들이라고 아이돌들이 완벽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돌 산업의 태동기였다면 모를까, 요즘처럼 사회관계망서비스가 대중화되고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차고 넘치는 세상에선 오히려 적당히 흠이 있는 게 매력으로 작동하는 법이다. 짠돌이로 유명한 엠블랙의 이준이나, 백치미를 매력으로 내세운 시크릿의 한선화, 웃을 때 얼굴 윤곽이 허물어져 내리는 웃음으로 팬들에게 어필하는 걸스데이의 민아, 성형수술 전력과 맥락 없는 수다스러움이 매력인 제국의 아이들의 광희까지. 팬들도 아이돌이 사람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는 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줄 뻔히 안다. 그러면서도, 이것만은 지켜줬으면 하는 판타지를 갖게 된다. 이를테면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진 않길 바란다거나, 어쨌든 팬들에게만큼은 늘 상냥하고 정직한 사람이기를 바란다거나. “돈과 시간과 애정을 투자”했는데, 그 정도 판타지를 요구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판타지의 거래는 사실 대부분의 인간관계에서 작동하는 원리다. 친구 관계, 선후배 관계, 스승과 제자, 아버지와 아들. 우리는 존경하거나 애착을 둔 존재를 만나면 그 대상에게 실제보다 더 큰 환상을 투사한다. 상대로부터 어딘가 있을 법한 이상향을 찾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 사람이 완벽한 사람은 아닐지 몰라도, 그래도 이런 점은 실망시키지 않겠지’라고 환상의 최대치를 타협해가며 말이다. 그러고는 종종 그 환상이 깨지는 순간을 목도하고 좌절하는 것이다. 평생의 스승으로 여기던 이가 알고 보니 자신이 경영하는 사업장에서는 경영난을 핑계로 직원들의 임금을 일방적으로 깎으려 들었단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혹은 언제나 단정한 일처리로 모두의 존경을 받는 선배가 사석에서는 인신공격성 발언을 일삼는 사람임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상대에게 걸었던 판타지가 처참하게 배신당했다는 환멸을 느끼며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이 사람이 내 기대를 무참히 짓밟았으니 이 사랑을 접을 것인가, 아니면 초라해진 상대라도 이 사람이 흠결 있는 사람임을 직시하고 그마저 끌어안을 것인가? 소녀시대의 팬덤 내에도 과거 다른 아이돌의 팬이었다가 소녀시대로 넘어온 경험이 있는 이들이 있을 테니 잘 알 것이다. 영원을 이야기하며 한 팀으로 있을 것 같던 멤버들이 사실은 복잡한 계약 문제와 돈 문제로 불화를 빚다가 초라하게 해체할 때의 상실감. 상대가 ‘완벽한 인간’이길 바라던 것도 아니고, 그냥 소소한 판타지라도 충족시켜주길 바라던 작은 기대가 무참히 배신당할 때의 고통을 말이다. 그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정말, 이 사람을 좋아하며 모아왔던 모든 사진 자료와 동영상을 컴퓨터 하드디스크에서 삭제하고, 이미 구매했던 포토북과 앨범들을 파기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그 실망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이 사람을 계속 좋아해도 될까? 상처를 안고 상대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나는 이 글을 통해 결코 어느 쪽이 더 성숙한 형태의 사랑이니 어떻게 하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인생은 짧고,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만 사랑을 하기에도 우린 너무 바쁘다. 얼굴을 맞대고 하는 사랑도 그럴진대 하물며 아이돌 팬질이야. 다만 그런 식의 사랑도 가능은 하단 말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환상을 걷어내고, 초라한 상대의 모습을 직시했을 때, 그런데 그게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많이 초라하거나 추하진 않다는 걸 발견했을 때, 환상을 걷어내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이다. 오해와 불화, 각자의 개인활동과 사건사고를 겪고서야 다시 돌아온 지오디(god)를 보며 새삼 그들을 많이 그리워했음을 깨닫는 지오디 팬들이나, 갖가지 사건사고와 심각한 불화를 경험한 뒤에도 재결성을 이야기하는 멤버들만 바라보고 있는 에이치오티 팬들처럼, 상대가 완벽하지 않다는 걸 인정한 후에도, 사랑은, 삶은 계속된다. (난 지금 아이돌 팬질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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