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프리실라>에서 애덤 역을 맡은 조권. 설앤컴퍼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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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재밌는 건 굉장히 보수적인 사람들도 이 작품을 보고 나서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소수자를 지지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이 만나 편견을 넘어서고 공감을 이뤄내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관객들에게 감동을 준다.”(게리 매퀸, 오리지널 프로듀서) “마음의 문을 조금만 열고 편견을 버리면 신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게이·트랜스젠더는 이야기를 거들 뿐 주제는 휴머니즘이다.”(<뉴시스> 이재훈 기자) 한국 초연에 들어간 뮤지컬 <프리실라>에 대한 제작진과 언론의 말들이다. 두 명의 드래그퀸(여장 남자. 그 자체로 성적 지향을 나타내는 단어는 아니라서 동성애자일 수도 있고 이성애자일 수도 있다)과 트랜스젠더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뮤지컬을 추천하면서, 제작진과 언론은 필사적으로 “단순한 성적 주제를 탐구하는 작품이 아니라 보편적인 가족애와 휴머니즘을 다룬 작품”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드래그퀸 뮤지컬 출연진 기사에 성 정체성 조롱·비난 댓글 넘쳐
이 작품의 보편성 강조해야하는
한국사회 평균의 인권감수성과
편협한 미감은 과연 타당한 걸까 정말 <프리실라>에서 성적 주제는 단순 소재에 불과할까? 1994년 제작된 원작 오스트레일리아(호주) 영화 <프리실라>를 본 사람들은 이미 이 작품이 어떤 내용인지 알고 있다. 한물간 퇴물 취급을 받으며 드래그퀸 쇼 무대에 오르는 드래그퀸 틱은, 자신이 일하는 호텔에 와서 공연을 해달라는 아내 마리온의 제안을 받는다. 오래전부터 별거 상태에 들어간 아내와 자신의 존재를 모르는 어린 아들을 마주해야 하는 상황. 틱은 동료 애덤, 버너뎃과 함께 대형버스 ‘프리실라’를 몰고 자신이 사는 시드니에서 호텔이 있는 앨리스 스프링스까지 호주의 사막을 횡단한다. 틱 일행은 혐오자들이 버스 위에 남기고 간 ‘호모 새끼들은 꺼져라’라는 낙서 앞에서 낙담하지만, 사막 한가운데에서 핑크색 페인트로 낙서를 덮어 버리고 심기일전해서 다시 길 위에 오른다.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대우를 당하는 세상 속에서 틱의 아들은 드래그퀸인 아버지를 이해해줄 수 있을까? <프리실라>를 관통하는 고민은 물론 아버지가 아들을 만나러 가는 부성애와 가족애, 그리고 사막을 가로지르는 동안 깊어지는 자아 찾기 등의 보편적인 주제다. 하지만 이 보편성에 대한 탐구는 소수자로서 사회로부터 배척되어온 이들의 관점 안에서 이루어진다. 아들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도 자신을 아버지로 받아들이고 사랑해줄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 틱의 두려움의 근원이자 그가 처한 특수성이고, 그 특수성은 작품 전체를 감싸는 핵심이다. <프리실라>가 지닌 이러한 특수성은 ‘화려한 의상과 여성 디바들의 팝 명곡’과 같은 볼거리 요소로만 묘사하고, 작품의 내용에 대해서는 보편성만을 힘주어 강조하는 일부 평들은, 어찌 보면 작품의 절반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눈을 감은 것이다. 제작진이나 언론의 속내가 짐작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지난 8일 열린 프레스콜에서, 애덤 역을 맡은 조권은 코르셋 차림으로 솔로곡인 마돈나의 ‘머티리얼 걸’ 무대를 선보였다. 파격적인 외양은 사진 기사를 통해 화제가 되었지만, 그 기사 밑에 달린 댓글들의 분위기가 온화하진 않았다. 조권의 옷차림에 대한 반감과 조롱부터 시작해, 배우 본인의 성 정체성에 대한 무례한 넘겨짚기가 댓글난을 뒤덮었다. 보다 못한 조권 자신이 트위터를 통해 “‘조권 진짜 게이 아냐?’ 이게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요. 저 때문이라서 중요한가요? 저한텐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런 말들이 오히려 그분들에 더한 상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입장을 밝히기에 이르렀다. 댓글난에 드러난 성 소수자에 대한 이해나 인식은 작중 일행의 버스 위에 ‘호모 새끼들은 꺼져라’라는 낙서를 남긴 혐오자들의 편견에서 멀지 않고, 제작진과 언론은 그런 이들의 손가락질 때문에 작품의 보편성이 가려질 것을 우려했으리라. 물론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룰 거면 굳이 드래그퀸이라는 화려하고 눈에 띄는 소재를 안 택하는 게 전략적으로 옳은 선택이 아니냐’고 되묻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잠시 조권의 일화보단 덜 알려져 화제가 되지 않은 일화를 하나 보자. 뮤지컬을 홍보하기 위해 에스비에스(SBS) 라디오 <컬투쇼>에 출연한 버너뎃 역의 조성하는 뮤지컬에 굉장히 화려한 볼거리가 많으며 자신도 극중에서 수영복을 입는다는 말을 했다. 앞서 조성하가 하이힐을 신고 여장을 한다는 사실을 소재로 농담을 치던 컬투는 그 이야기에 이렇게 응수했다. “설마 비키니는 아니죠?”(김태균) “제가 비키니를 입으면 어울릴까요?”(조성하) “아, 정말 더러울 거 같은데요.”(정찬우) 공개방송에 참여한 좌중은 폭소했고, 이 발언을 다룬 어떠한 기사도 논란이나 화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조성하처럼 어느 정도 덩치가 있는 중년남성이 비키니를 입는 것이, 많은 이들에겐 상상만으로도 낯설고 아름답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다. 애초에 비키니는 생물학적 여성의 몸에 맞춰 디자인된 옷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거기에서 바로 ‘더럽다’는 판단으로 점프하는 건 일단 인권 감수성의 문제다. 그런 옷을 입음으로써 자신 안의 여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성 소수자의 자아 추구 권리를 무시하는 거니까. 그리고 인권 감수성보다 더 큰 문제는, ‘더럽다’고 느끼는 많은 이들의 미감이 어떤 기준으로 학습되고 내재된 미감이냐는 것이다. 아마 이런 반응은 남성이 여성의 옷을, 그것도 여성의 육체의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종류의 노출이 많은 옷을 입은 것에 대한 가장 즉물적인 반응일 것이다. 보는 이들의 미감을 해친다는 것이다. 최근 신촌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가 혐오시위에 나선 일부 개신교인들과 혐오단체들에 가로막혀서 논란이 되었을 때, 일부 사람들이 ‘전술적 효과’를 이야기하며 “사람들이 보기에 거부감이 드는 지나친 노출이나 문란한 연출을 하면 오히려 반감을 불러오는 게 아니냐”고 건넨 ‘충고’ 뒤에도 이러한 인식이 숨어 있다. 왜 드래그퀸 쇼는, 왜 퀴어 퍼레이드는 화려함과 퇴폐미를 강조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이다. 드래그퀸 쇼나 퀴어 퍼레이드가 화려함과 퇴폐미를 강조하는 데는 두 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는 그것이 일상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쇼이고 축제이기 때문이다. 물랭루즈의 쇼나 브라질 리우 카니발이 젊은 남녀의 육체미를 과시하듯 말이다. 정말 중요한 둘째 이유는, 그런 도발적인 옷차림들이 성 소수자의 육체를 강하게 부각시킴으로써 이성애 중심적인 성적 규범에 균열을 내기 때문이다. 화려하게 치장을 하거나 노출이 심한 복장을 입는 것 자체가, “남자는 이렇게, 여자는 이렇게 입어야 하고, 이것이 성적으로 안전한 복장”이라 강요된 고정관념에 정면으로 맞서는 동시에 “너희는 외면하고 싶겠지만, 우리는 여기에 멀쩡히 존재한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행위인 것이다. 코르셋 차림의 조권 사진 기사 밑에 악플을 달고, 비키니 차림의 조성하를 떠올리며 방송에서 서슴없이 “더러울 것 같다”고 말하게 만들며, 퀴어 퍼레이드에 참여한 이들에게 “거부감이 든다”고 말하게 만드는 미감. 그 미감은, “남자에겐 파랑이, 여자에겐 핑크가. 남자에겐 바지가, 여자에겐 치마가. 남자에겐 근육이, 여자에겐 가슴과 엉덩이의 피하지방이 아름다움의 기준이 된다”고 가르치는 이성애 중심적인 미감이다. 더구나 이런 미감은 대체로 “다른 것도 어울리지만 이게 좀더 잘 어울려”라는 권장의 방식이 아니라, “그렇게 계집애처럼 입고 다닐 거면 고추 떼버려라”라는 식의 배제와 폭력으로 공고화되어 왔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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