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명량> 촬영 현장에서 이순신을 연기하던 최민식. 최민식은 이순신이란 캐릭터를 이해하기 위해 절박하게 노력했고, 그 고뇌와 서성임의 흔적은 스크린에 남았다. 백종헌 <씨네21> 기자
|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한 가지는 확실히 해두고 시작하자. 개인적으로 <명량>(2014)을 두고 걸작이라거나 수작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통제사 이순신부터 전장을 뛰어다니는 탐망꾼, 전쟁에 휘말리는 백성들까지 다양한 계층의 자리에서 총체로서의 전투를 그리려는 감독의 야심은 좋았으나, 그 모든 요소들이 불균질하게 섞이면서 극의 모양새는 다소 애매해진다. 배설과 같은 내부의 적이나 구로지마 같은 외부의 적은 평면적으로 묘사되었고, 김태훈이나 고경표 같은 배우들은 지나치게 작은 역할을 맡아 낭비됐다. 긴박한 해전의 전투 양상 자체에만 집중했어도 충분히 고단함과 절박함이 표현되었겠지만, 영화는 빈번한 슬로모션과 줌인을 남발하고 비장한 배경음악을 까는 것으로 관객에게 감정을 강요한다. 역사적 기록을 왜곡해가면서 삽입한 전투 후반의 몇몇 대목이나, “후손 아그들은 우리가 이렇게 개고생한 걸 알랑가?/ 고것을 모르면 호로자슥이제”와 같은 대사들은 노리는 바가 노골적이어서 민망할 지경이다. 이 불균질과 감정 과잉, 메시지 강요와 같은 난맥을 극복해내는 것은 61분의 해전이 주는 스펙터클과 전쟁터에서 전략이 어떤 식으로 활용되는가를 보여주는 밀리터리 장르 자체의 재미, 그리고 극의 중심을 잃지 않고 지탱해 낸 이순신 역의 최민식이다. ‘질펀한 인간’들 연기했던 최민식‘완벽한 영웅’ 이순신 역 맡으면서
연기에 확신 못갖고 ‘찝찝함’ 토로 전장에 선 이순신의 불안·고독이
최민식의 회의감과 묘하게 겹쳐
탁월한 심리극 같은 감동 빚어내 캐릭터 이해위한 절박한 노력 덕에
새로운 이순신·최민식으로 재탄생 아마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요소로 언급한 최민식에 대해선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무렴, 국민배우인데. 최민식인데. 게다가 극의 중심인 이순신인데. 최민식이 <명량>의 핵심인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 하지만 따지고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최민식은 이미 여러 차례 인터뷰를 통해 충무공 이순신을 연기하는 것은 그간의 작품들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아직도 자신의 연기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하게 했다. 그가 그간 연기해 온 다른 인물들과 달리, 이순신은 그 깊이를 이해하는 게 범인으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영화주간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최민식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공을 세워도 임금은 무시한다. 그럼에도 어떻게 저런 무조건적인 충성심이 나올까. 처음에는 ‘그도 사람인데’라는 생각으로 접근했지만,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그는 그야말로 완벽한 인간이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상황에서 어찌 그럴 수 있었을까.” 최민식은 자신의 이해 너머에 있는 이순신을 연기하는 것이 혹시나 이순신에게 누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를 걱정했고, 자신이 최선을 다하지 못한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토로했다. 따져보면 그렇다. 최민식이 맡아왔던 캐릭터들은 <쉬리>(1999)의 박무영이나 <올드보이>(2004)의 오대수, <악마를 보았다>(2010)의 장경철처럼 비범한 인물이었던 적도 있고, <파이란>(2001)의 이강재나 <범죄와의 전쟁>(2012)의 최익현처럼 살면서 한번쯤 마주쳤을 법한 사람이었던 적도 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삶이 남겨준 군살이나 얼룩을 한두 개쯤은 가진 인간들이었다. 혹은 최민식이 에스비에스(SBS) <힐링캠프: 좋지 아니한가>에 출연했을 때 썼던 표현처럼 어딘가 ‘질펀’한 인간들이라 해도 좋겠다. 이순신은 경우가 다르다. 판옥선 열두 척으로 수백 척의 세키부네를 맞아야 했던 상황, 심지어 경상우수사라는 자는 전쟁을 앞두고 탈영을 하고 임금이란 자는 “일이 다 그른 것 같으니 때려치우고 육군에나 합류하라”는 교지를 보내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상황 앞에서도, 이순신은 묵묵히 전투 준비에만 몰두했다.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길이 열릴 것이라 말하며 울돌목으로 배를 몰았다. 후대의 기록들이 강조하는 ‘성웅’의 아우라를 걷어내고 공식 기록들 위주로만 살펴보아도, 이순신은 보통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을 훌쩍 뛰어넘은 존재인 것이다.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배역들을 도맡아왔던 최민식에게, 완전무결의 인간을 연기해야 하는 상황은 분명 당혹스러웠으리라. 영화를 보다 보면 그런 당혹감이 스크린 너머로까지 전달되는 순간들이 종종 있다. 자신을 최대한 절제해가며 담담하게 전투를 준비하는 이순신의 모습이 우리가 익히 아는 최민식의 모습과는 달라 낯설다가도, 전투를 앞두고 과거 전우들의 환시를 보는 대목이나 불타는 배 앞에서 오열하는 장면에선 영락없이 우리가 익히 아는 최민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순간에는 담대하게 전투를 살아낼 계획을 치밀하게 설계하는 군신 같다가도, 또 어느 순간에는 죽기에 가장 좋은 자리를 찾아 그리로 걸어 들어가고자 하는 허무주의자 같기도 하다. 최민식이 그려낸 이순신은 절반 정도는 우리가 아는 ‘성웅’으로서의 이순신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고문의 후유증과 나이의 한계를 고스란히 안고 피 흘리고 절룩거리는 몸뚱어리다. 그리고 배우의 혼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두 지점 사이에서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순간들은 희미하게나마 그 흔적을 남긴다. 자, 그렇다면 본인조차 확신이 들지 않았다는 최민식의 연기가 <명량>의 무게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공교롭게도 ‘이것이 정말 이순신의 마음이었을까’를 끝없이 회의하고 때로는 자괴감에 시달렸다는 최민식의 상황은, 열악한 전력으로 대군을 맞이해 어떻게든 싸워내야 했던 이순신의 상황 위에 절묘하게 겹쳐진다. “신에겐 아직 배 열두 척이 남아 있”다는 호기로운 문장을 써내려 가던 바로 그 순간에도, 피로와 쇠약함 때문에 떨리는 손을 간신히 부여잡아야 했던 이순신은 위태로워 보인다. 불안과 고독을 안고 전장에 나섰을 이순신이란 캐릭터 위에 배우 본인이 느꼈을 불안과 회의가 겹쳐지자, 영화는 종종 이순신의 복잡한 심경 속을 탐험하는 탁월한 심리극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것이 김한민 감독이 의도한 바나 최민식이 의도한 바는 아닐 것이다. 감독이 이순신의 심리에 집중하려고 했다 보기엔 민초들의 활약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높고, 배우로서 자신의 의구심과 회의를 관객에게 들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는 일이 아닐 테니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답을 찾아내기 위해 온 힘을 다 쏟아낸 배우의 재능과 노력이 상황과 맞아떨어져 나온 기막힌 우연의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반문할 것이다. 배우나 감독이 의도한 바가 아닌 우연의 결과까지도 칭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냐고 말이다. 나는 잠시 다른 예를 들어보고자 한다. 고 김기영 감독은 영화 <화녀>(1971)를 찍으면서, 주인공 명자(윤여정)가 천장에서 떨어지는 쥐 떼를 맞으며 울부짖는 악몽 장면을 더 생생하게 찍고 싶다는 욕심 하나로 윤여정을 속였다. 영문도 모르고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으면 된다는 지시만 받았던 윤여정은, 자신의 위로 쥐 떼가 쏟아지자 진심으로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렇다고 그 장면을 윤여정의 연기로 인정할 수 없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설국열차>(2013)에서 메이슨 총리(틸다 스윈튼)가 일장연설에 나서는 대목, 총리 뒤에 서 있던 부하 하나가 뭔가를 떨어뜨려 금속성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연설을 하다 말고 잠시 놀라 뒤돌아본 메이슨 총리는, 당황한 표정을 수습하고 다시 연설을 이어간다. 봉준호 감독에 따르면 이 장면은 의도된 것이 아닌 엔지(NG) 컷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틸다 스윈턴의 반응이 절묘하게 캐릭터의 질감을 살린다고 판단한 봉준호는 그 장면을 영화에 삽입했다. 우리가 기억하고 사랑하는 영화의 적지 않은 순간들은 이렇게 감독이나 배우의 의도를 벗어난 절묘한 우연으로 완성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배우나 감독의 노력을 폄하할 수 있을까?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