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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8.15 18:30 수정 : 2015.10.23 14:29

핫펠트(HA:TFELT)라는 예명으로 돌아온 예은.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핫펠트(HA:TFELT)라는 예명으로 돌아온 예은의 첫 미니앨범 <미(Me)?>는 여러모로 흥미롭다. 소속사 제이와이피(JYP)의 색깔이 거의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우직하게 더브스텝과 트립합, 슈게이징 록 등의 음울한 톤으로 일관한 장르 구성이나,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를 예명으로 세우며 자신의 본명 앞에 필터를 한 겹 씌운 것, 7곡의 수록곡 모두 공동 작사, 작곡으로 이름을 올리며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에 집요하게 매달린 행보 등은 소속팀 원더걸스가 쌓은 이름값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예은으로 평가받고 싶다는 강한 의지의 결과로 보인다. 앨범 전체를 함께 작업한 공동 작곡가 이우민의 존재를 감안하더라도, 아이돌 음악 시장에서 이만큼 자의식이 가득한 앨범은 드물다.

원더걸스 멤버로 가장 빛나다
“불길로 뛰어들었던” 몇년의 시간
정상서 너무 빨리 내려왔지만
과거 영광보다 앞 보는 지혜 있어
자신의 취향 밀어붙인 첫 미니앨범
‘이게 나의 목소리’ 존재증명 나서
제법 흥미로운 결과물 만들어내

물론 이 앨범만으로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예은의 현재에 대해 섣부른 찬사를 늘어놓기는 어렵다. 많은 평자들은 엑스엑스(The XX)나 뱅크스, 라나 델 레이나 시아 등 국외 아티스트들이 이번 작업의 레퍼런스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고, 그런 탓에 이 앨범을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독창적인 아티스트의 작업으로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유튜브만 두어 시간 정도 뒤져봐도 쉽게 찾아낼 수 있는 이 레퍼런스의 명단을 늘어놓으며 대단한 걸 발견한 양 굴고 싶은 게 아니다. 음악평론가 차우진이 지적한 것처럼, 이 긴 명단에서 진짜 중요한 건 예은이 그것을 어떤 식으로 활용하느냐다. 엑스엑스나 뱅크스가 영국 현지에서 얻는 주목과 명성에도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소개되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의 음악이 일관되게 고수하는 음습한 정서 때문이다. 시아는 미국에서 메가톤급 히트를 친 아티스트지만, 시아의 안무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는 예은의 안무는 미국 현지 케이팝 팬들에게도 낯설고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동시대 국외 아티스트 중 가장 실험적이고 불친절하며, 음울함에서 한 극단에 가 있는 아티스트들의 트렌드를, 예은은 대중적인 색채를 가미하거나 한국 정서에 맞추는 일 없이 그 정서의 힘 그대로 밀어붙인다.

레퍼런스 과잉의 앨범을 두고 아티스트의 독창성을 논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대의 수많은 아이돌 음악 작곡가들 또한 국외의 트렌드를 실시간으로 수용하고 재해석하는 작업을 펼치고 있는데, 유독 예은에게만 레퍼런스 과잉을 물어 앨범 전체의 완성도를 폄하한다면 그건 이중잣대일 것이다. 이번 미니앨범이 차트 정상을 오래 지키고 있다거나 독보적인 지지를 받지는 못했지만, 싱어송라이터로서의 ‘데뷔’ 앨범이라고 본다면 예은은 제법 흥미로운 결과물을 선보이는 데 성공한 듯 보인다. 적어도 지금의 예은이 동시대 음악의 가장 전위적인 지점을 놓치지 않고 짚어내었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의 톤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딱히 자신의 취향을 타협할 생각이 없을 정도로 그 확신이 강하다는 점을 짐작할 만한 결과물인 것이다.

그의 취향과 레퍼런스를 활용하는 방식만큼이나, 앨범 전체에서 느껴지는 강한 자의식 또한 흥미로운 지점이다. 앨범 안에서 예은의 자의식은 종종 ‘원더걸스의 연장선상으로서가 아니라, 온전히 나의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식으로 튀어나온다. ‘트루스’(Truth)나 ‘에인트 노바디’(Ain’t Nobody)와 같은 곡들은 장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제이와이피나 원더걸스의 앨범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곡들이고, 이 곡들을 살려 자기 소신대로 앨범을 완성하기 위해 박진영과 신경전을 벌였다는 일화는 이미 여러 차례 인터뷰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동시에 예은의 자의식은 원더걸스의 리드보컬 예은으로서의 자리를 부정하지 않는다. 앨범을 여는 첫 트랙인 ‘아이언 걸’에는 원더걸스의 막내인 혜림이 참여했는데, 혜림과 술제이가 함께 작업한 랩 부분을 찬찬히 읽고 있노라면 원더걸스가 지난 몇 년간 겪어야 했던 시간들을 짐작해볼 수 있다. “한발 뒤로 물러섰다고 졌다고 생각하지. 두 눈에 보이지 않아 끝이라 말들 하지. 위기는 곧 기회, 상처는 갑옷이 돼… (중략) 돈과 명예보다 더 소중한 내 음악. 끝났다고? 누가 그래. 이건 끝내주는 음악.”

잠시 원더걸스가 경험해야 했던 지난 몇 년을 짧게 돌이켜보자. 당대의 트렌드를 반영한 데뷔곡 ‘아이러니’는 생각만큼 히트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세대에선 익숙하지 않은 레트로풍의 곡들을 부르자 비로소 대중이 열광하는 기묘한 괴리감을 경험했다. 그 시절 ‘텔 미’와 ‘쏘 핫’ ‘노바디’로 이어지는 레트로 3부작은 어찌나 히트를 했는지, ‘국민 걸그룹’이란 낯간지러운 수식어를 남발하는 데 그 누구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원더걸스는 그 인기를 다 누려보기도 전에 미국 진출이라는 새로운 미션을 받는다. 언론의 엄청난 주목과 소속사의 야심찬 포부에도 미국 진출은 성공적인 결과를 내지 못했고, 그사이 한국에선 다른 걸그룹들이 차근차근 자리를 잡았다.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와 발매한 <투 디퍼런트 티어스>(2 Different Tears)의 음원 성적은 나쁘지 않았지만, 예전과 같은 인기를 유지하진 못했다. 미디어는 원더걸스에게 미국 진출 과정에서 경험했던 고생담들을 물었고, 그때마다 원더걸스는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었다. 슬슬 ‘울려고 미국에 진출했느냐’는 식의 냉소가 대중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 몇 년 사이 멤버 중 누군가는 활동을 중단했고, 리더는 결혼을 했으며, 대중적인 인기를 가장 많이 보유했던 팀의 막내는 연기에 뜻을 품고 소속사를 옮겼다.

생각해보면 그 어떤 일들도 멤버들의 잘못은 아니다. 미국에 진출한 것도, 진출 과정이 순탄치 않았던 것도, 그 순탄치 않은 과정이 과장된 형태로 언론에 홍보된 것도, 그러는 동안 정상으로부터 너무 빠른 속도로 내려온 것도, 멤버 중 누군가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거나 새로운 목표를 위해 소속사를 옮긴 것도. 하지만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종종 그렇듯, 연예인들은 유명하다는 이유만으로 종종 필요 이상의 조롱과 섣부른 평가를 당하곤 한다. 한때 원더걸스에 환호했던 사람들 중 적잖은 이들이 너무 쉽게 ‘원더걸스도 이제 한물갔다’는 말을 입에 올렸다. 잘못의 결과가 아닌 것으로 조롱을 당하고, 그나마 예를 차린다는 이들조차 그들에게 원치 않는 동정을 보내는 상황. 공교롭게도 일찌감치 팀을 떠났던 현아와 선미가 각각 그룹과 솔로 활동으로 재기하는 데 성공하는 동안, 예은은 야심차게 도전한 드라마가 소리소문 없이 잊히는 통에 ‘근황이 궁금한 연예인’이 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짧지 않은 침묵 끝에 솔로로 돌아온 예은은 ‘아이언 걸’을 통해 자신이 경험한 그 무엇도 실패가 아니었음을 선언한다. 비록 “불길로 뛰어들었”고 그로 인해 “온몸이 붉게 타올랐”다고 한 시절을 회고하지만, 동시에 자신은 그로 인해 더 강해졌을 뿐이라 말하는 예은은 사람들에게 선입견을 거두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말하지, 넌 껍데기일 뿐이라고. 하지만 내가 무엇 하나 걸친 것 없이 바닥에 서 있는 거 보이지?”라고 묻는 예은의 파트는, 분명 자신의 상황에 지나치게 빨리 실패를 단언하고 조롱을 던진 이들에게 보내는 대답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번 앨범을 하나의 키워드로 설명한다면 ‘증명’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들이 뭐라 생각할지 몰라도 난 패배하거나 끝난 존재가 아니고, 이렇게 내 목소리를 내면서 당당히 서 있다’는 존재 증명 말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살면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지나갔고, 그렇게 빛나는 시간이 다시 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순 없다. ‘아이언 걸’의 가사처럼 “아마도 난 황금은 아닐 거고, 빛나는 은조차 안 될지” 모른다. 남들은 빛나던 예전과 지금의 부진을 비교해가며 쉽게 평가하고 재단할 것이고, 그래서 스스로도 끝났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채 좋았던 예전만을 그리워하며 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는 것은 언제나 내가 과거에 무엇을 이루었고 얼마나 성공했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래서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의 문제다. 스물여섯의 나이에 자기 존재 증명에 나선 예은은 그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노래한다. 황금도 아니고 은도 아니지만 “그러나 난 강철의 소녀”라고 선언하며 말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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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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