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레이디스 코드의 활동 당시 사진. 맨 왼쪽과 둘째가 교통사고로 숨진 권리세와 고은비다. 주니(왼쪽 셋째부터), 소정, 애슐리는 부상에서 회복중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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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장면 하나. 2006년 12월이었다. 에스비에스(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에서 함께 활동하던 세 명의 개그우먼 김형은, 심진화, 장경희는 ‘미녀 삼총사’라는 팀을 결성해 가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연말엔 스케줄이 많았고, 적잖은 행사들이 그렇듯 그날의 불우이웃돕기 행사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한 시간쯤 늦춰졌다. 심진화의 주장에 따르면 무대에서 내려온 것은 오후 7시16분께였고, 다음 행사는 강원도 용평의 스키장이었고 무대에 오르려면 8시30분까지는 도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교통체증이 심한 토요일 저녁에 서울시내를 통과해 용평까지 180여㎞를 한 시간 안에 주파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회사는 스케줄을 소화할 것을 요구했고, 급하게 달리던 자동차는 결국 빙판길에서 미끄러지며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다. 이 사고로 목을 크게 다친 김형은은 15일에 걸친 수술과 사투 끝에 끝내 세상을 떠났다. 2007년 1월10일 새벽 1시였다. 마침 코미디언들에 대한 글을 쓰면서 칼럼니스트로서의 커리어를 막 시작할 무렵이던 나는, 친구들과 함께 운영하던 작은 웹진의 대문에 김형은의 사진을 걸고 추모의 글을 썼다. 정확한 문구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이런 비극적인 일이 다시는 없기를 바라며 당신이 우리에게 준 슬픔보단 우리에게 주었던 웃음으로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정도의 내용이었지 싶다. 장면 둘. 2013년이었다. 음악 업계에서 일하는 친구와 이야기하던 중, 문득 명색이 대중문화 쪽 글을 쓰는 사람치곤 업계의 현실을 너무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친 나는 친구를 붙잡고 물었다. “그쪽 고용 상황이 그렇게 안 좋아?” 친구는 담배를 깊게 빨았다 내쉬고 입을 열었다. “아, 이 회사는 굉장히 어려운가 보다 하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알아? 잡코리아나 인크루트 같은 인터넷 구인구직 사이트에 구인광고를 올리는 회사라면 지금 정말 어렵다는 이야기야.” 아니, 신규 고용을 하겠다는 회사가 어렵다니 그게 무슨 이야기일까. “생각해봐. 업계가 그렇게 넓지 않아. 누가 어느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지 빤하거든. 굳이 구인광고를 안 내도 사람이 필요하면 다 알음알음 연락해서 인력을 구해. 그런데 그러지 않고 일반인들이 다 볼 수 있는 취업 포털에 구인광고를 올린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월급을 제대로 못 준다는 게 업계에 소문이 났단 뜻이지. 돈 제대로 못 받은 사람들은 회사를 떠나고, 급하게 사람은 구해야 하는데 업계 내부에선 그 돈 받고 일할 사람 찾기 어렵고. 그러니까 취업 포털까지 오는 거지.” 친구는 최근 어떤 회사가 구인광고를 냈는지 살짝 귀띔해줬다. 이름만 대면 대부분 다 알 만한 유명 레이블들이었다.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내게, 친구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요새 사운드 엔지니어들이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개발 회사로들 많이 가잖아. 그쪽은 그나마 돈이 되니까.” CD 안 팔린 지 오래MP3도 스트리밍 서비스에 밀려
음원 팔려도 석달 뒤에야 입금
이들이 먹고살 수 있는 길은
선금 목돈으로 주는 행사뿐… 음악 시장의 상황이 안 좋은 거는 알고 있었지만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안 좋아진 걸까. 잔혹한 설명은 계속됐다. “일단 시디(CD) 안 팔리지? 음원 요율이 살인적으로 낮은 엠피3(MP3)도 요즘엔 다운로드 받는 사람보다 월 정액 스트리밍으로 듣는 사람이 더 많지. 점점 음악으론 돈을 벌기 어려운 구조가 되어버린 거야. 대형 레이블들이 왜 드라마 제작이나 영화 제작, 뮤지컬 제작에 참여하는 거 같아? 수익을 최대한 다변화해야 살아남을 수 있어서 그래. 하지만 그 정도 능력이 되는 회사가 어디 흔해? 소속 가수가 어느 정도 인기가 있다면 구즈(관련 상품) 장사를 한다거나 티브이에 나온다거나 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인기가 생기고 난 다음의 이야기지.” 할 말이 많았는지, 친구는 잠시 숨을 돌린 뒤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지금 이 업계에 갑자기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과잉경쟁을 하고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야. 제작자들 머릿수는 예나 지금이나 비슷해. 시장 자체가 줄어든 거지. 한류 열풍 타고 해외로 나가면 되지 않느냐고? 해외 프로모션은 돈 안 들어? 게다가 모든 해외 프로모션이 남는 장사도 아니야. 결국 음악계의 내수시장이 망가져서 이 모양이 된 거야. … 너 모바일 음원 팔면 수익이 언제 들어오는지 아냐? 네가 3월에 음원을 발표해서 좀 팔았다고 쳐. 정산은 두 달 뒤인 5월에 되고, 진짜 통장에 꽂히는 건 석 달 뒤인 6월이야. 음원이 아무리 잘 팔려도, 분기에 한 번 정산하는 이 시스템에선 3월부터 6월까지 꼼짝없이 손가락 빨아야 하는 거야.” 나는 두려움을 누르고 친구에게 물었다. “그럼 그동안은 다른 수익으로 먹고살아야 하잖아. 회사 직원들이 많으면 그 사람들 월급 줄 돈도 있어야 하고. 음악을 해서 그렇게 돈이 안 되는 거면, 고정 출연하는 방송도 없고 앨범이나 구즈를 사줄 충성도 높은 팬덤도 없는 가수들은 그러면 뭐로 먹고사는 거야?” 친구는 쓴웃음을 씩 지어 보이며 답했다. “행사지, 행사. 선금으로 목돈 꽂아주는, 행사.” 친구가 뿜어 올린 담배 연기가 아득했다. 장면 셋. 먼발치에서나마 그를 직접 본 적이 있다. 2011년 4월 일산 문화방송(MBC)에서였다. 그날은 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의 첫 생방송 날이었고, 그는 생방송에 진출한 참가자 중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참가자였다. 출연하자마자 스타성을 인정받을 만큼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였던 동시에, 생방송에 진출하기엔 가창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가장 많이 받는 참가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바로 권리세였다. 뭐든 악바리처럼 열심히 노력한다던 그였지만, 취재를 나온 기자들은 입을 모아 그의 탈락을 점쳤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첫날 탈락했던 그는, 멘토인 이은미의 품에서 잠시 울었지만 이내 웃어 보였다. 퇴사를 한 달 앞두고 프리랜서로서의 불확실한 미래 앞에 떨던 나는 순간 그에게 감정을 이입했다. 그래, 지금의 실패가 당신의 전부는 아닐 거라고, 그렇게 웃으며 악바리처럼 해나가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좋은 날이었을까. 글쎄. 모르겠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끝난 뒤 그는 함께 출연했던 남자 참가자와 함께 가상 부부가 되어 <우리 결혼했어요>에 출연했고, 몇 건의 패션 화보도 찍었으며, 몇 년 뒤엔 마침내 5인조 여성 아이돌 ‘레이디스 코드’의 멤버가 되었다. 몇 곡의 싱글을 발표했고, 확 뜨진 않았지만 알아보는 사람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이렇게 악바리처럼 노력하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믿었을까. 9월3일 새벽 행사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회사는 그날의 스케줄이 전혀 무리한 스케줄이 아니었노라고, 여느 아이돌들이나 다 소화하는 스케줄이라고 해명했다.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날 잡혀 있던 스케줄은 대구에서 있었던 한국방송(KBS) <열린음악회> 녹화가 전부였고, 여덟 시에 무대에 올라 공연을 마친 뒤 서울로 돌아오면 되는 일정이었으니까. 물론 의견은 갈린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국내 연예기획사 대표는 시비에스(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다음날 분명히 스케줄도 있을 거고, 피로도 누적이 된다. 그러다 보니까 빨리 들어와서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해” 빨리 달렸을 것이라 말했다. 빨리 오려다가 난 사고였을까. 증언은 갈린다. 소속사는 ‘뒷바퀴가 갑자기 빠져 빗길에 미끄러졌다’고 밝혔고, 목격자는 ‘앞차를 추월하려다 전복됐다’고 말했다. 어느 이야기가 맞는 건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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