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신해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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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부터 발밑이 아득했다. 아무리 팬질을 그만둔 지 수년이 지났다고 해도, 한때나마 열과 성을 다해 좋아했던 가수가 심정지 이후 심폐소생을 거쳐 수술에 들어갔다는 뉴스 앞에서 안도할 수 있는 팬이 누가 있으랴. 마음은 갈피를 못 잡고 위아래로 출렁였다. 고개를 쳐드는 불안을 나는 근거 없는 낙관으로 잠재우려 했다. 괜찮을 것이다. 6년 만에 낸 솔로 앨범의 두 번째 파트도 발매해야 하고 오랜만에 다시 뭉친 넥스트(N.EX.T)도 신보 발매를 앞두고 있으며, 투어 콘서트 계획도 잡아둔데다가 새로 시작하는 토크쇼 프로그램까지, 벌여둔 일만 한 두름이 넘는 사람 아닌가. 설마하니 몸 관리를 그렇게 대책 없이 했을라고. 수술이 끝나면 금방 일어날 것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쾌유를 비는 토막글을 남기는 것조차 하려다 관뒀다. 전처럼 열심히 신보를 사서 듣는 팬인 것도 아니고, 심지어 제일 최근 앨범은 듣고 나서 ‘예전만 못하다’고 잔뜩 투덜거린 주제에 이제 와서 새삼스레 팬입네 하며 걱정하는 글을 남기는 일은 적잖이 염치 없다 느껴졌다. 괜히 수선 떨면 부정 탈라. 그렇게만 생각했다.
수술 후 이틀이 지나도록 그가 의식을 찾았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어떤 언론은 패혈증을 이야기했고 오래지 않아 스마트폰 메신저 프로그램으로 온갖 흉흉한 소식을 담은 증권가 ‘찌라시’들이 돌아다녔다. 마음이 다시 더 큰 진폭을 그리며 출렁였다. 병원과 소속사의 공식 브리핑으로 패혈증이나 찌라시가 제기한 소문들은 가셨지만 그렇다고 걱정까지 가시는 건 아니었다. 갑갑한 게 나 혼자가 아니었는지, 메신저 창에는 “넌 뭔가 알고 있지 않냐”는 질문들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나와 비슷한 시기인 2000년대 중반 팬질을 접은 이부터, 그가 넥스트 해체를 선언했던 1997년 무렵 일찌감치 마음을 접었다는 이, 심지어는 평소엔 티를 안 내 아무도 팬인 줄 몰랐던 이도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연예인 걱정이라는데 우리 지금 뭐 하고 있는 걸까. 메신저 창에, 사회관계망서비스 알림창에 하나둘씩 수면 위로 떠올라 그에 대한 지극한 걱정을 토로하는 이들의 행렬을 보며 새삼 깨달았다. 적어도 90년대에 10대를 보낸 우리에게, 신해철은 단순한 연예인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신해철은 한국 대중음악계가 전에 경험한 적 없는 독특한 캐릭터였다. 점잖은 모범생 헤어스타일로 ‘그대에게’(1988)나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1990)와 같은 노래를 부르며 세상이 ‘딴따라’에게 허용한 범위 안에서만 머물렀어도 그는 충분히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해철은 자꾸 세상이 그어놓은 선을 월경해 자신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거침없이 내뱉곤 했다. ‘나에게 쓰는 편지’(1991)에선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라고 사회적 통념에 질문을 던졌고, ‘날아라 병아리’(1994)에선 그 고운 미성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처음 경험한 소년의 충격을 노래했다. ‘세계의 문’(1995)에서는 “이제 타협과 길들여짐에 대한 약속을 통행세로 내고 우리는 세계의 문을 지나왔다”고 일갈하며 물적 진보에 대해 물음표를 던졌다. 동성동본 간의 결혼이 위법이던 시절 그들의 선택을 응원하는 노래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1995)를 발표했고, ‘매미의 꿈’(1998)을 통해 말 잘 듣는 어린양으로 양육된 아이들이 자력으로 세상에 나가지 못하는 사회적 불구가 되는 현실을 향해 침을 뱉었다. 문화방송(MBC) <100분 토론>에 나가기 전에도, 신해철은 좀처럼 순치되기를 거부하는 사람이었다. 그랬으니 90년대에 10대를 보내며 다리가 끊어지고 백화점이 주저앉으며 급기야 나라가 파산하는 세상을 목격한 소년소녀들에게 신해철을 듣는다는 게 어떤 의미였겠는가. 그것은 흡사 “나는 사회가 요구하는 것만 보고 듣고 말하며 살진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사회적 통념에 한방 먹이던 그의 노래 가사와 언행에
빚지지 않은 30~40대 드물다
“내가 아직도 이렇게까지
신해철을 좋아했었나”
뒤늦은 감사의 고백 되지않게
병상 훌훌 털고 회복해주길 누구의 간섭이나 침범 없이 오롯이 제 목소리를 내겠다는 고집은 단순히 가사의 선명성으로만 이어진 것이 아니다. 신해철은 빠른 시일 안에 완성도 있는 솔로 앨범을 준비하기 위해 세션맨들을 끌어모으는 대신 혼자 컴퓨터로 작업하는 길을 택했고, 필요로 인해 택한 그 길이 향후 작업들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초등학교 견학 때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보고 감명을 받았다는 신해철은 사운드를 확 벌려 듣는 이를 압도하고, 여러가지 사운드 요소를 조밀하게 중첩시키는 방식의 작법을 추구했다. 이 과정에서 솔로 시절부터 시작된 컴퓨터 작업은 신해철이 사운드 요소들을 설계하고 배치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영국 유학 도중 발표한 <크롬스 테크노 웍스>(1998)의 사운드가 보여주는 복잡하고도 정교한 리듬 설계나, <모노크롬>(1999) 앨범에서 창과 구음이 공간감을 뽐내며 뻗어나갈 수 있게 국악기 사운드와 기타, 베이스, 드럼, 신시사이저를 톱니바퀴처럼 짜맞춰 깔아둔 솜씨는, 제 목소리를 내기 위해 혼자 컴퓨터와 씨름하며 음악을 직조하던 그의 고집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성취였다. 근작 ‘에이.디.디.에이’(A.D.D.a)(2014)에서 보여준, 오로지 아카펠라로만 음악을 만들기 위해 1000개가 넘는 트랙을 녹음하고 그걸 일일이 디지털 엔지니어링을 거쳐 각종 악기의 질감을 표현해낸 강박적인 작업 또한 마찬가지였으리라. 집요하고 강박적인 작업으로 빚어낸 조밀하고도 웅장한 사운드 위에, 삶과 죽음, 세계와 자아, 사회와 부조리, 그리고 통념과 맞서 싸우는 개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노랫말을 얹어 들려주던 싱어송라이터. 저마다 자신이 조숙하다고 느끼곤 했던 10대의 길목에서 신해철을 만난 적이 있는 우리는, 그가 만든 노래들을 들으며 그렇게 세상에 대한 분노를 삭이고 그에게 기대어 세상을 건넜다. 비록 세월이 지나 이제 “돈, 큰 집, 빠른 차” 자체가 행복은 아닐지언정 그거 없이 행복을 이야기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란 걸 아는 나이가 되었고, 더이상 신해철이 노래한 “약속, 헌신, 운명, 영원, 그리고 사랑” 같은 단어들을 믿던 대책 없는 낭만의 시절이 다 지나갔다 하더라도. 그래서 아직까지도 날을 세워 세상과 불화하고, 전보다 더 위악적인 톤의 가사를 내뱉으며, 우리 나이로 마흔일곱이 된 지금도 여전히 통념과 싸우는 소년의 자리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신해철을 보는 게 조금은 불편해졌다 하더라도. 90년대에 질풍노도의 10대를 보낸 나와 나의 친구들은 모두 얼마간은 그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소리 높여 세상과 싸우기엔 잃을 것이 많아 매번 움츠러들었지만, 그렇다고 군소리 없이 세상이 시키는 대로 살기엔 숨이 막혔던 우리는. 이 원고를 쓰는 지금까지도 신해철이 의식을 되찾았다는 소식은 아직 들려오지 않는다. 대신 사회관계망서비스에 들어갈 때마다 눈을 뜨면 제일 먼저 하는 게 그의 이름을 검색해보고 쾌차의 소식이 들려오지 않음에 안타까워하는 이들의 말들이 눈에 밟힌다. 타임라인 위로 “내가 아직도/ 이렇게까지 신해철을 좋아했었나”라는 새삼스러운 애정과 걱정의 글들이 속속 올라오는 것은, 혹여 이것이 너무 늦은 감사의 고백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내가 공적인 지면을 지나치게 사적인 고백으로 채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끝내 실패하고야 만 것처럼 말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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