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4.11.07 18:52 수정 : 2015.10.23 14:26

임시완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아버지는 병석에 몸져누웠다. 아르바이트를 병행하지 않고선 생계를 장담할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바둑에 전념하지 못했고, 전념하지 않고도 입단할 만큼 기재가 뛰어나진 않았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바둑을 그만둔 그는 후원자의 도움으로 대기업 무역상사의 인턴 자격을 얻지만, 고졸 검정고시 학력만 가진 그에게 돌아오는 건 노골적인 야유와 따돌림이다. “열심히 하세요. 계속 그렇게 열심히만.” 자신의 등에 대놓고 야유를 던지는 동료 인턴사원의 말에 장그래는 조용히 속으로 중얼거린다. “내가 열심히 했다고? 아니, 나는 열심히 하지 않아서 세상에 나온 거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 버려진 것뿐이다.”

평생을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살아왔던 노력 같은 건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 장그래는 열심히 살아왔노라 항변하는 대신 내가 나태했노라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한다. 열심히 했음에도 어찌할 수 없는 아버지의 병과 가세의 몰락 탓에 좌절‘당한’ 거라 생각하면 너무 아프니까.

윤태호의 동명 만화를 원작 삼은 티브이엔(tvN) 드라마 <미생>(2014)의 주인공 장그래는, 그렇게 제 몫이 아닌 잘못에 대해서도 사과하고 자책한다. 입단에 실패하게 된 수많은 이유들을 단지 열심히 하지 않은 탓이라고 목구멍 뒤로 꿀꺽 삼켜버린 그는, 기밀문서를 흘렸다는 오해를 사서 옥상으로 불려가 얼차려를 받고, 다른 부서에서 분실한 서류에 대한 책임을 ‘고졸의 낙하산 신입사원’의 실수라고 전가당하기도 한다. 소리 높여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을 법도 하고, 자신을 오해한 사람들을 원망할 법도 하다. 장그래는 그 모든 부조리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참아낸다. 몇 마디 말로 오해가 풀릴 리도, 부조리가 사라질 리도 없으니까. 소리내어 울고 세상을 향해 주먹감자를 날린다고 처지가 나아지진 않는다는 걸 아는 그는, 그저 일단 조용히 버틴다. 지금의 굴욕과 부당함을 무사히 견뎌내고 살아남아야 내일을 도모해볼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러고 보니 장그래를 연기한 임시완에게서 비슷한 모습을 본 기억이 있다. 한국방송(KBS) 드라마 <연애를 기대해>(2013)의 진국은 연인이 다른 사람을 마음에 담자 그 이유가 연인의 불성실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는 건 아닌가를 먼저 의심했다. 문화방송(MBC) 시트콤 <스탠바이>(2012)의 시완 또한 제 앞에 닥쳐오는 시련을 처연한 눈빛으로 맞이하는 종류의 인물이었다. 교통사고로 어머니(김희정)가 죽은 것이 그의 탓도 아니고, 어머니와 결혼하기로 했던 진행(류진)의 집에 얹혀살게 된 것이 그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그는 눈칫밥을 얻어먹고 구박을 들어야 하는 처지를 묵묵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 <변호인>(2013)이 있다. “바위는 부서져 모래가 되어도 계란은 언젠가 깨어나 그 바위를 넘는다”고 말하던 파릇한 청년 진우는, 온갖 고문에 몸과 마음이 망가진 채 기계처럼 중얼거린다. “내 진짜로 잘못했습니다. 내 앞으로 잘못 안 하겠습니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진짜로 잘하겠습니다.” 정말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짓지도 않은 죄를 고백하고 반성할 것을 강요당하는 어느 청춘의 얼굴.

임시완을 청춘스타로 만든 요소를 꼽으라면 여러 가지를 댈 수 있을 것이다. 소속 아이돌 그룹 ‘제국의 아이들’의 팬들이 붙여준 별명 ‘임저씨’(임시완과 ‘아저씨’의 합성어)가 암시하는 특유의 진지함과 신중함, 주어진 배역에 몰입하느라 가수 활동과 배우 활동을 병행하는 게 힘들었다는 연기에 대한 애착, 하얀 피부와 붉고 도톰한 입술, 반짝이는 눈망울과 가녀린 선으로 요약해볼 수 있을 빼어난 외모까지. 여느 미남 스타들이 스타덤에 오르는 것과 같은 루트를 타고 올라온 그의 성공 공식 자체만 보면 그리 특이할 것은 없다. 하지만 지금껏 그 어떤 청춘스타도 이렇게 반복해서 자신의 탓이 아닌 것들의 책임을 짊어지는 역을 맡아 사랑받았던 적은 없다. 한 세대를 정의하고 대변하는 ‘청춘스타’의 키워드는 언제나 저항과 반항, 자기연민과 자아도취, 푸르름과 생기 넘침 따위였지, 주눅듦과 자책, 견뎌내기였던 적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임시완의 성공은 다분히 징후적이다.

제 몫이 아닌 잘못에 사과하고
모든 부조리를 제 탓으로 돌리며
시간을 조용히 견뎌내는
‘미생’의 장그래
‘어떻게 살아야 한다’가 아닌
‘이렇게 살고 있다’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전달했다

정치평론가 김민하는 지금의 2030 세대에 대해 “뭘 해도 되는 일은 없는 주눅든 세대”라고 정의한 바 있다. 경기침체도 그들의 탓이 아니고, 무한경쟁 체제도 그들의 탓이 아니며, 제대로 돌아가는 것 같던 민주주의 발전의 시계가 뒤로 역행하는 것도 그들의 탓은 아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에게 쉬지 않고 훈계한다. 젊은이들이 직장을 고를 때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 수동적으로 일자리를 기다릴 게 아니라 스티브 잡스처럼 창의적인 인재가 되어 창업을 해야 한다. 이기적인 요즘 애들은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으려 해서 문제다… 다른 한편에선 이렇게 말한다. 선거날 투표는 안 하고 놀러 다니기나 하는 젊은이들 때문에 나라가 이 모양이다. 예전엔 대학생들이 사회 변혁의 전위였는데 요즘 대학생들은 스펙 경쟁에 눈이 멀었다… 물려받은 세상에서, 그 세상을 물려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착실히 살아왔을 뿐인 이들은, 졸지에 생산성 저하와 내수경기침체, 앙시앵레짐(구체제) 복원의 원흉으로 몰려 손가락질당한다. 김민하의 말처럼 어쩌면 지금의 2030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칭찬하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칭찬을 받을 수 없던 세대”(김민하, ‘흔한 이야기가 ‘사연’이 되는 이유’, <주간경향> 1001호)인지 모른다.

주눅든 장그래를 표현하기엔 너무 탐스럽게 붉은 입술을 지닌 탓에 컴퓨터그래픽으로 입술을 어둡게 그려 넣어야 할 정도의 미모를 지닌 임시완은, 자꾸 자신의 탓이 아닌 책임을 질문당하는 역을 맡는다. ‘생긴 거랑 다르게’ 라거나 ‘어울리지 않게’라고 말하는 건 쉽다. 그러나 그런 그조차도 <미생>의 장그래나 <스탠바이>의 시완, <변호인>의 진우가 그랬듯 제 탓이 아닌 것들에 대해 책임을 자문하고 그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다. 아이돌 그룹 데뷔를 준비하기엔 다소 늦은 대학생 시절 연예계에 발을 들인 그는, 소속 그룹이 인기를 얻지 못해 절반쯤은 무명으로 지내야 했던 시간 동안 스스로를 의심했다. “아이돌로 활동하기에 적지 않은 나이이고, 잘하는 동료들이 너무 많아 난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하고 노력을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겠더라. 능력도 없는데 얻어걸린 거라면, 잘하지도 않으면서 괜히 욕심만 내는 거라면, 이곳에선 민폐인거다.”(‘임시완-조용하지만, 강한’, 이화정, <씨네21> 935호)

그의 말에서 날고 기는 동기들 사이에서 어떻게 노력을 해야 하는지 몰라 당황해하는 <미생>의 장그래를 떠올리는 게 비약은 아닐 것이다. 해왔던 노력을 부정당하고 그것이 제 잘못이 아닐까 자책하던 그는, 기껏 작품으로 성공을 거둔 이후에도 “운이 좋아 능력 이상의 것들을 얻었다”며 자신의 노력을 인정하는 것을 망설였다.

<미생> 제작발표회 현장에서, 임시완은 기자들에게 장그래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노라 말했다. “장그래는 본인이 있던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 와서 환대받지 못하는 친구잖아요. 저 역시 제가 몸담는 곳에서 환대받지 못했고 사회를 구성하는 데 제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될 정도로 존재감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가 있었거든요. (중략) ‘내가 몸담고 있는 이곳에 있는 게 맞는 건가’라는 생각도 많이 했죠.”(<오마이스타> 2014년 10월6일)

이승한 티브이평론가
그러고는 그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장그래는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 절대다수의 사람 중 한 명”이며, <미생>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다’고 보여주는” 작품이라 말했다. 자신의 것이 아닌 책임을 온 등에 꾸역꾸역 짊어지고, 자신이 노력을 안 해서 이 모양이 된 것이라고 자책하면서, 임시완은 그렇게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다”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전달한다. 몸에 맞지 않는 아버지의 양복을 입은 채 네온사인이 빛나는 도시의 한복판에 홀로 떨궈진 “이 세상 절대다수”, 수많은 장그래 중 한 명이 되어. 잔뜩 주눅든 우리 시대의 청춘의 얼굴이 되어.

이승한 티브이평론가

〈미생〉섬뜩한 현실, 위로의 판타지 [잉여싸롱#48]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