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염정아. 사진 오계옥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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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대형마트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을 다룬 영화 <카트>(2014)의 한 장면, 직원 휴게공간에 새겨진 문구가 보는 이들의 숨을 일순 막히게 만든다. “우리는 항상 ‘을’입니다.” 미치거나 폭발하지 않기 위해 저 문구를 얼마나 되뇌었던 걸까. 그 문구 앞에 덩그러니 서 있는 선희(염정아)의 표정은 무채색에 가깝다. 선희는 지난 5년을 벌점 1점 쌓는 일 없이 착실하게 을로 살아온 끝에, 회사 쪽으로부터 정규직으로 채용해 주겠노라 구두 약속을 받는 데 성공했다. 진상 손님이 “무릎 꿇고 사과하라”면 무릎 꿇고 사과해야 하고, 회사가 연장근로를 요구하면 계산대 업무든 ‘까대기’(화물차로 배달 온 물류를 하차해 분류하는 작업)든 가리지 않고 해야 하는 폭압적인 근무환경. 이 악물고 버텨온 결과 선희에게 돌아온 것은 회사의 일방적인 해고 통보였다. 아이들 앞에선 차마 티 낼 수 없었던 설움은 혼자 주방에 남겨진 뒤에야 간신히 터져 나온다. 들썩이는 선희의 어깨를, 카메라는 제법 오래 응시한다. 주눅 든 염정아, 어눌한 말투의 염정아는 의외였던 걸까. 적잖은 이들은 <카트>에서 그가 보여준 연기를 설명하기 위해 ‘연기 변신’이나 ‘건재함을 재확인’ 같은 표현을 동원한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대중에게 널리 각인된 염정아의 이미지란 화려하고 예민하며, 깐깐하고 도도한 ‘서울 깍쟁이’에 가까우니까. 유난히 좋은 발음과 카랑카랑한 하이톤의 발성이 특징인 배우가, 불평불만을 꾹꾹 눌러가며 평생을 바보처럼 우직하게 살아온 선희를 연기하는 건 의외의 선택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대본을 받아 든 염정아는 대번에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나 이런 역할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단다. 자세히 뜯어보면, 선희 역시 그동안 염정아가 분해왔던 인물들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은 인물이다. 지도부가 되어 투쟁을 이끌어가긴 했지만, 선희는 견결한 투사나 투철한 노조주의자가 아니다. 이론적인 토대나 강철 같은 신념은 동료 혜미(문정희)의 것이었고, 정신적인 구심점은 맏언니인 순례(김영애)였다. “회사가 있어야 나도 있다”는 구호를 착실히 외쳐오던 선희는 해고 통보를 받고 난 다음에야 얼결에 노동조합에 가입했고, 그 자리에서 손목이 붙잡혀 등 떠밀리듯 노조의 지도부가 되었다. 협상을 요구하면 응할 줄 알았던 회사는 외면으로 답했고, 하루만 하면 되겠지 싶었던 점거농성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렇게 엉거주춤 얼결에 시작한 투쟁이었지만,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또한 선희다. 노조를 와해시키려는 회사 쪽의 농간에 질린 동지들이 다들 포기한 순간 그는 동지들을 간곡히 설득한다. 이대로 끝내기엔 너무 억울하지 않냐고, 다시 싸우자고. 돌이켜보면 늘 그랬다. 신념이나 주의에 경도되어 움직이는 건 염정아의 방식이 아니었다. <간첩>(2012)의 남파 15년차 고정간첩 강 대리는 일찌감치 조국 통일에 대한 신념이나 주체사상을 폐기처분했다. 한때 연인이자 동지였던 우 대리(정겨운)가 왜 자신을 버리고 떠났느냐고 묻자, 술잔을 기울이던 강 대리는 냉정하게 쏘아붙인다. “그래서 뭐 어쩌자고. 너랑 나랑 잘됐을 거라고 생각해? 퍽도 좋았겠다. 애 엄마 아빠가 다 간첩이라서. 너랑 나랑은 미래가 없어. 아직도 모르겠냐?” 염정아가 연기하는 강 대리에게 신념이나 동지애 같은 가치들과 자신과 아이의 미래를 맞바꿀 생각 따윈 추호도 없다. 그에게 중요한 건 자식에게 미래가 보장된 삶을 선물하는 것이고, 그 삶만을 위해 앞으로 달려간다. ‘사회주의 조국’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부동산중개업을 하면서. 법정 중개수수료를 에누리 없이 따박따박 받아가면서. 서울 깍쟁이 이미지인 그녀가주눅 들고 어눌한 말투 역할 맡아
영화 ‘카트’를 본 적잖은 이들은
“연기 변신” 같은 표현을 동원했다 하지만 그녀가 맡은 배역들은 늘
절박하게 발버둥치는 인물이었다
이번에 마트 노동자를 연기한 건
그들의 간절함을 이해함이리라 이념을 냉소하기로는 <오래된 정원>(2006)의 윤희도 마찬가지다. 황석영의 동명소설 속에서도 적잖이 시니컬한 인물이었던 윤희는, 임상수 감독의 각색을 거치며 그 냉소의 정도가 더 심해졌다. 수배된 연인 현우(지진희)가 자신이 잠수를 풀고 수면 위로 올라가야 하는 때가 된 것 같다고 말했을 때, 윤희는 눈물로 현우를 붙잡는 대신 차갑게 쏘아붙인다. “때 좋아하시네.” 평생 사회주의자들과 노조주의자들 근처를 어슬렁거렸음에도 자신은 단 한순간도 어떤 ‘주의자’로 살지 않았던 윤희는, 그 모든 ‘주의자’들이 변절해 출세하거나 초라하게 패배해가는 동안 오롯이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킨다. 공장 옥상에서 투신한 미경(김유리)이 죽은 자리를 찾아가 애도하는 것도, 무기수로 언제 나올지 모르는 현우를 오래오래 기다린 것도 끝내 윤희였다. 시대 따위 아랑곳없이 마음껏 사랑하고 살고 싶었던 윤희는 현우와 보냈던 짧지만 완벽했던 한 시절을 배신할 수 없었고,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오래오래 현우를 기다린다. 그 숭고함을 가능케 했던 것은 어떤 ‘주의’가 아니라, 어떠한 삶의 방식에 대한 갈망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염정아가 연기하는 인물들은 늘 신념이나 주의가 아니라 삶에 대한 간절함 그 자체를 원동력으로 움직였다. 화면 위의 염정아는 때론 화려하고 도도하며 섬세한 인물이었지만, 한꺼풀 표피를 벗기고 들어가면 늘 절박하게 발버둥치는 인물이었다. 과거의 악몽에서 벗어나 살고 싶었던 <장화, 홍련>(2003)의 계모가 그랬고, 날고 기는 사기꾼과 도둑놈들이 모인 판에서 크게 한탕 하고 싶었던 <범죄의 재구성>(2004)의 ‘구로동 샤론 스톤’ 서인경이 그랬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가혹한 운명을 숨긴 채 재벌가에서 살아남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문화방송(MBC) 드라마 <로열 패밀리>(2011)의 김인숙 또한 예외는 아니었으며, 하다못해 코미디 영화인 <여선생 대 여제자>(2004)에서조차 그는 마음에 드는 남자를 쟁취하기 위해 초등학생 제자와 신경전을 벌였다. 어쩌면 이런 간절함은 본인의 삶과도 닮아 있는 건지 모른다. 염정아는 과거 문화방송 <무릎팍도사>에 출연했을 때, ‘최종 꿈이 무엇이냐’는 강호동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저는 원래 계획을 거창하게 세우는 스타일은 아니고. 저희 가족들하고 잘 사는 거죠. 그게 제일 큰 목표예요. 우리 애들한테 가장 좋은 부모가 되어주고, 저희 남편이랑 저랑 잘 사는 모습을 보여줘야 아이들도 분명히 그 영향을 받아서 잘 살 테니까요.” 거창한 이념이나 계획은 없다. 목표는 사는 것, 살되 ‘잘’ 사는 것. 작품 안에서든 작품 밖에서든, 그 삶에 대한 절실함이야말로 염정아를 추동해온 힘이다. 중학교 시절 연기자의 꿈을 품은 후 그는 단 한 번도 그 길에서 이탈하거나 한눈을 팔아본 적이 없이 앞으로만 돌진했다. 그는 예정된 수순처럼 고등학교를 예체능계로 진학했고,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선택해서 갔다. 아무도 추천하는 이가 없었음에도 스스로 예쁘다고 생각했기에 미스코리아에 나갔고, 끝내 배우가 되었다. 그러고도 <장화, 홍련>으로 주목받기까지는 근 10년이 필요했지만, 그는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켰다. 다시 <카트>로 돌아오자. 투쟁을 좌절시키려는 회사 쪽의 농간 앞에서, 아들의 아르바이트비를 떼어먹으려는 편의점 사장 앞에서, 자신들의 절박한 싸움을 두 눈으로 보고도 외면하는 사람들의 콘크리트 같은 무관심 앞에서 선희는 절박하게 소리 지른다. 대단한 신념이나 치밀한 정치적 목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이대로 잊혀지고 무시당하고 패배한 채 살아갈 수는 없어서, 사는 것처럼 살아야겠기에 그는 기어코 목소리를 낸다. 스스로 사회적 이슈에 큰 관심이 없었다던 염정아가 배역을 보자마자 잘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은, 분명 인물이 지닌 삶에 대한 간절함을, 그 온도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이승한 티브이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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