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출신의 통역가 에네스 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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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결혼 사실을 숨기고 복수의 여성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방송인으로도 승승장구하는 듯 보이던 터키 출신의 통역가 에네스 카야는 모든 방송 활동을 중단했다. 제이티비시(JTBC) <비정상회담>을 통해 터키의 보수적인 문화를 대변해왔던 사람이 정작 사생활의 영역에서는 부도덕한 행동을 해왔다는 의혹 앞에서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흔치 않았고, 의혹의 수위는 높고 해명은 개운치 않으니 사태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은 점차 싸늘해졌다. 연예 가십 매체들은 앞다투어 에네스에 관련된 기사를 쏟아내고 있으며, 댓글난은 그의 부적절한 처신을 질타하는 댓글들로 도배됐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에네스에 대한 비난으로 시작된 댓글들이, 터키 출신 남자들, 나아가 모든 무슬림 남성들에 대한 비난으로 너무 쉽게 점프해 버리는 것이다. 과장이 아니다. 댓글난을 보면 아주 난리도 아니다. “원래 무슬림 남자들은 어떻게든 여자를 희롱해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존재들”이라거나, “중동놈들은 모두 자기네 나라로 쫓아내 버려야 한다”는 제노포비아성 발언, 한국 여성들에게 “외국 남자라면 무조건 좋아하는 버릇을 버리라”고 ‘충고’하는 목소리까지. 네이버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 성향의 누리꾼이 많다고 평가되는 포털 다음의 댓글들이 이 모양이다. 물론 에네스가 <비정상회담>에서 터키 출신 남성을 대변하는 역할을 해왔던 탓이 클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한두 세대 앞서 독일 출신 남성을 대변해 온 바 있는 방송인 출신 이참 전 한국관광공사 사장이 일본 풍속업소 성매매 논란으로 사퇴했을 때, 그에 대한 비난은 오로지 이참 개인의 차원에만 머물렀지 독일인에 대한 혐오 발언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그런데 왜 에네스에 대한 비난은 갑자기 그의 국적과 종교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는 걸까?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은 아마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 이번 스캔들로 자신의 편견을 공증받는 계기로 삼고 있다’는 것이리라. “내 진작부터 수상하다 했어. 그럴 줄 알았다”라는 댓글이 눈에 밟힌다. 물론 이런 반문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슬람 율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여성을 함부로 대하고 남성우월주의적 언행을 정당화하는 일부 무슬림 남성들이 있고, 그것을 문화적 다양성을 이유로 마냥 용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며, 그런 걸 고려하면 그동안 터키인을, 그중에서도 보수적인 터키인을 대변한다고 말해온 에네스의 스캔들을 단순히 ‘개인적인 비행’으로만 볼 수는 없지 않으냐고 말이다. 설령 이러한 주장들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에네스 카야라는 한 개인의 사생활 문제를 “에네스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모든 무슬림 남자들은 혼인 상대에게 충실하지 않다”는 비약으로 연결시키고, “그러니 추방해야 한다”고 외치며 다문화 정책에 대한 파산 선고를 내리는 행위를 정당화할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입장을 바꿔서, 이 스캔들의 주인공이 터키 출신 남성이 아니라 한국인 남성 연예인이라고 가정하면 조금 더 판단이 쉽지 않을까? 십수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또한 “남자가 바깥일을 하다 보면 여자가 꼬일 수도 있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유통되는 나라였지 않나. 아침 정보 프로그램의 부부생활 상담 코너에서 남편의 외도 때문에 받은 고통을 호소하는 여성에게 “꾹 참고 너그럽게 받아들이라”는 요지의 말을 ‘충고’랍시고 건네는 인물이 버젓이 출연한 게 불과 몇년 전이다. 그렇다고 그걸 근거로 “모든 한국 남자들은 가정에 충실하지 않다. 연예인 모씨의 외도가 그것을 입증한다”고 말한다면 흔쾌히 수긍할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에네스에 대한 질타가무슬림 남성 비난으로 ‘점프’
유명인의 특징적 언행을
모집단에 투사해 편견 정당화
편견을 교정하지 않는 사회는
적극적으로 편견을 키우는 사회 티브이에 출연하는 유명인의 특징적인 언행을 그가 속한 모집단에 투사한 다음, 그것을 빌미로 해당 집단에 대한 자신의 편견을 정당화하는 태도는 비단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호남 출신의 전직 야구선수가 저지른 살인사건은 지역차별을 정당화하는 핑계로 사용됐고, 한 여성 출연자가 내뱉은 “키 180㎝ 이하의 남성은 루저”라는 발언은 “요즘 젊은 여자들” 일반에 대한 분노의 근거로 쓰였다. 방송인 홍석천이 인기를 얻게 된 계기였던 ‘쁘아종’이란 캐릭터의 몇몇 특징들, 이를테면 여성스러운 말투와 잘생긴 남자들에게 던지는 헤픈 추파와 같은 요소들은 남성 동성애자 전체에 대한 이성애자들의 선입견를 입증하는 증거로 호출되기도 했다. 댓글난에서, 인터넷 게시판에서,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편견은 연예 가십에 실려 널리 유통됐다. 특정 지역을 차별하고, 여성과 성소수자들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의 오해를 증폭시켜온 이 메커니즘은 이제 특정 국가와 종교를 겨냥한다. 서글픈 이야기지만, 이런 일이 딱히 이상하지는 않다. 티브이는 무척 강력한 매체니까. 이미 대부분의 가정에 보급되어 있어서 전원을 켜는 것만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으니 말이다. 티브이를 비판적으로 조목조목 따져가며 시청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고, 별생각 없이 보다 보면 무의식중에 티브이에 나오는 사람이나 주장의 권위를 자연스레 신뢰하게 된다. 뭘 좀 아는 사람이니까 티브이에까지 나왔겠지. 뭐 문제 있는 사람이니까 저런 식으로 묘사되겠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편견을 정당화할 만한 근거를 찾아야 되는 순간이 될 때, 티브이에서 보고 들은 걸 근거로 호출하는 것이다. “여자들의 외모지상주의가 문제야. 티브이 못 봤어? 남자 키가 180이 안 되면 루저로 본다면서?” “무슬림 남자들이 원래 좀 그래. 에네스 못 봤어? 합리적인 보수주의자인 척은 혼자 다 하더니 말이야.”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인터넷 악성 댓글 몇 개에 뭘 그렇게 호들갑을 떠냐고. 그런 댓글을 다는 사람들에게 주목하는 건 괜히 관심받고 있다는 만족감을 주는 일이라고. 어차피 침묵하고 있는 소수가 더 많으니 과장하지 말라고. 지금껏 우리가 견지해왔던 태도는 대체로 그랬다. 편견을 과시하는 이들과 굳이 분란을 빚지 말자. 그 결과가 무엇인가?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모욕하는 이들을 무시하며 ‘키보드 뒤에서나 떠드는 사회 부적응자들’이라고 치부한 결과, 우리는 그들이 광화문광장에서 폭식투쟁을 하는 꼴을 보게 되었다. “좌파들을 모조리 잡아 없애자”는 댓글을 헛소리 취급을 했더니 서북청년단이라는 끔찍한 이름을 21세기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종교를 근거로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보호해선 안 된다는 극단주의자들의 언사를 비웃어 넘기자, 그 한 줌의 사람들이 혐오시위를 벌였고 정치권은 한심하게도 그들의 눈치를 봤다. 자신이 정치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이들에게 백색 테러를 가하겠다는 이야기를 무심코 넘겼더니 한 고등학생이 손수 만든 폭발물과 황산을 행사장에 던지는 일이 터졌다. 편견을 굳이 교정하지 않는 사회는, 사실 적극적으로 편견을 키우는 사회인 것이다. 더 불안한 것은, 자신의 편견을 공공연하게 전시하는 이들 중 ‘진보 성향’을 자처하는 이들도 부쩍 늘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들이 인터넷을 타고 둥둥 떠다니고 있는 것이다. “진보주의자라도 ‘나는 동성애 별로야’라고 말할 권리가 있는 거 아닌가요? 왜 사상의 자유를 가로막죠? 전체주의도 아니고.” 혹은 이런 언사들. “다문화주의는 민족혼을 흐릿하게 만들어 자신들의 살길을 도모하려는 친일파 잔당 수구보수 세력의 음모다. 새누리당이 이자스민을 비례대표로 내세운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냐. 왜 우리가 낸 세금으로 불법 이민자들을 보호하고 혜택을 줘야 하나?” 기이하게 뒤틀린 억지 논리들은 “나는 진보주의자이지만 차별과 혐오, 배제에 찬성한다”는 ‘네모난 동그라미’ 같은 문장들을 만들어냈다. 앞뒤가 안 맞는 문장을 말하면서도 그 사실을 눈치 못 채게 만들 만큼, 편견은 힘이 세다.
이승한 티브이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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