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판결은 나왔지만 개운한 건 없었다. 배우 이병헌에게 동영상을 빌미로 50억원을 요구했다는 혐의로 구속 기소된 모델 이아무개와 가수 김아무개는 예상대로 실형을 선고받았고, 재판부는 이병헌이 유부남이자 유명인의 신분으로 이아무개씨에게 성적인 관심을 가지고 접근한 점이 사건의 빌미가 되었음을 언급하는 걸 잊지 않았다. 피고인 이아무개의 어머니는 항소 여부는 조금 더 상의해봐야 한다면서도 “자식을 잘못 키운 자신의 죄”라고 말했고, 언론들은 이병헌의 승소 소식을 전하면서도 그의 처신에 대한 품평과 이미지 실추의 불가피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선고 공판이 있던 날, 피고인 김아무개씨가 소속된 아이돌 그룹은 계약 해지 및 해체 소식을 발표했다. 지극히 예상대로 흘러간 1심이었으니 딱히 새로울 것도 없다.
“승소는 했지만 승자는 없었던 싸움”. 1심 판결 결과를 보도한 연예 가십 전문매체 중 적잖은 수가 이번 사건에 대해 내린 평가다. 분명 이병헌과 피고인들이 맞이한 결과만 놓고 보면 이긴 사람이 없는 싸움 같아 보인다. 그러나 시야를 조금 더 넓혀보면 이 싸움에서 재미를 본 사람들이 누군지 보인다. 다름 아닌 연예 가십 전문매체들이다. 처음 사건이 터진 2014년 9월부터 시작해서 올해 1월에 이르기까지, 매체들은 경쟁하듯 이 사안을 보도하며 인터넷 트래픽 수익을 쌓아올렸다. 그 과정에서 같은 내용의 기사를 제목만 달리해 여러 개를 중복 생산해 조회 수를 높이는 ‘어뷰징’이나 타 매체의 보도를 고스란히 받아쓰는 베껴쓰기와 같은 고질적인 문제점들도 있었지만, 진짜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다. 첫째, 사생활의 영역에 있는 문자메시지들이 여과없이 보도됐다. 둘째, 언론이 앞장서 적극적으로 조롱에 동참했다. 셋째, 일부 언론은 이병헌의 배우자인 이민정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하며 비극을 기다리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연예인의 사생활을 어디까지 보도해도 되는가. 아주 오래된 논쟁거리다. 연예인의 사회적 지명도와 영향력을 고려하면 공인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과, 사적 계약관계를 통해 개인의 영리를 추구하는 연예인은 그저 유명한 사인일 뿐 공인이 아니라는 주장이 첨예하게 부딪혀왔다. 최근에는 토크쇼나 리얼리티쇼 등을 통해 자신의 사생활을 상품화하는 연예인들이 늘어나면서 “사생활의 밝은 부분은 가공해서 상품으로 판매하면서 어두운 부분만 보호받으려는 건 이율배반”이라는 주장도 등장했다. 하지만 공인에 대한 정의가 어떤가와 무관하게 지켜져야 하는 것이 있으니 ‘언론윤리강령’이다. 2011년 한국인터넷신문협회가 반포한 인터넷언론윤리강령은 사생활의 보도에 대해 명확한 기준을 세워놓고 있다. “언론인은 공익이 우선하지 않는 한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고, 개인의 사생활 보호에 노력한다”(제1조 5항), “언론인은 공익이 우선하지 않는 한 사적 영역이나 제한된 공적 영역을 방문해 취재하는 경우 반드시 당사자의 동의를 받고 프라이버시 보호에 유의한다”(제5조 3항).
이병헌과 이아무개가주고받았다는 문자를
상세히 보도하는 게
‘공익’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묻는다면
‘대중의 알 권리’라 말할지 모른다
이럴 때마다 등장하는 그 말은
가십 전문기자들조차
대체로 믿지 않는다 이병헌과 이아무개가 주고받았다는 문자메시지를 상세히 보도하는 게 ‘공익’에 얼마나 기여했는지에 대해 묻는다면, 누군가는 ‘대중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준 것도 ‘공익’ 아니냐고 말할지 모른다. 이럴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등장하는 ‘대중의 알 권리’라는 말은, 그 말을 하는 가십 전문기자들조차 대체로 믿지 않는다. 매체비평지 <미디어스>의 김완 기자는 <한겨레21>에 기고한 글 “‘디스패치’ 디스, 황색언론 딱 거기까지”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디스패치>는 청와대 비선 실세 의혹에 대한 중간결과 발표가 있던 날, 이병헌의 재판 기록을 ‘단독’이라며 던졌다. (중략) <디스패치>가 ‘창조’해낸 가상의 카카오톡 대화창은 부실한 검찰의 수사 결과를 가리는 가장 확실한 ‘우산’이 돼주었다. ‘로맨틱’ ‘성공적’과 같은 극단적으로 선정적이며 그 맥락과 쓰임을 확인하기 어려운 개인적인 것들의 유출 앞에서 정작 중요한 것으로 향해야 할 시선은 방향을 잃었다.” 언론이 앞장서 적극적으로 조롱에 동참한 것 또한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다. 이병헌과 이아무개가 주고받은 문자를 보도한 언론사는 사건이 촉발된 빌미를 이병헌이 주었다고 말할 때마다 그의 유행어였던 ‘단언컨대’를 끼워 넣었고, 한 군소 언론사는 이병헌이 출연한 할리우드 영화 <터미네이터: 제네시스>(2015)의 예고편이 공개되기가 무섭게 ‘월드산타’라는 단어를 헤드라인에 올렸다. 피고인 이아무개가 이병헌을 지칭한 ‘이산타’라는 단어와 ‘월드스타’를 묶은 단어를 앞세운 자극적인 헤드라인 덕분에, 이 군소 언론사는 잠시나마 대형 포털사이트 기사검색 결과의 상위권을 차지했다. “내일. 너. 로맨틱. 성공적”이라는 문자 내용이 공개된 후 한 포털사이트는 새해맞이 다이어트 관련기사 기획을 선보이며 헤드라인을 “올해. 너. 날씬. 성공적”이라고 뽑았다. <터미네이터: 제네시스>의 제작사 패러마운트가 기존에 거래하던 씨제이(CJ)엔터테인먼트가 아닌 다른 배급사를 통해 영화를 배급하기로 전략을 수정하자, 적잖은 언론이 이병헌의 사건 때문에 씨제이가 배급을 포기한 것처럼 기사를 작성했다. 두 사안을 묶어야 가십으로서의 파급력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병헌이 한 행동들은 조롱당하기 좋은 일들이다. 본인 입으로 결코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고 주장한 피고인들에게 “남자의 어디를 보면 흥분되느냐” “첫경험은 언제였냐”라는 성희롱성 질문을 던졌으면서도 그것이 단순한 농담이었다고 말하는 이병헌의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고, 자기 잘못은 최대한 은폐하고 고통은 강조하며 아내에게 잘하겠다는 뜬금없는 다짐으로 마무리하는 손편지는 구차했다. 이병헌이 ‘사실과는 다르다’고 주장했던 이아무개와의 문자 내용은 오히려 두 사람이 연인 사이였다는 이아무개의 주장을 탄핵하는 근거로 판결문에 인용되면서 그 존재가 증명됐다. 도덕적인 층위에서는 유부남의 부적절한 처신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고, 스타에게 별다른 도덕적 역할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회식자리 성희롱을 연상시키는 사안의 구질구질함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그것이 언론이 트래픽을 높이기 위해 자극적인 언어들로 조롱을 일삼는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 언론이 이병헌의 배우자 이민정에게 보여준 히스테리컬한 관음증과 참견도 오래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사건이 터진 직후부터 가십 매체들은 이민정의 행보를 주시했다. 그가 귀국 후 신혼집이 아니라 친정집으로 갔다는 소식을 시시콜콜 전하며 열을 올리던 가십 매체들은, 이민정이 이병헌과 함께 미국으로 출국하고 현지에서 찍힌 다정한 모습의 사진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공개되자 “이병헌 이지연 문자 내용에 네티즌들은 … 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식으로 기사를 빙자한 훈계를 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도 남편과 다정하게 있는 이민정이 불쌍하다거나, 아무 반응도 없는 이민정도 이상하다는 식의 주장은 ‘네티즌 의견’의 탈을 쓰고 기사의 말미를 장식했다. 한 칼럼니스트는 짐짓 점잖은 척 “대중문화는 상식을 기반으로 한다”며 “이런 상황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아내 이민정도 상식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어쩌라는 건가. 울기라도 하라는 건가? 자신을 배신한 배우자를 용서할 것인지 원망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당사자가 결정할 사안이다. 언론들이 갑자기 ‘네티즌 의견’이나 ‘상식’을 이야기하며 이민정에게 리액션을 닦달하는 광경은, ‘심경 토로’나 ‘파경’과 같은 비극이 끼얹어져서 더 탐스러운 가십이 되기를 기다리는 속내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끔찍하다.
이승한 티브이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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