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5.02.13 20:17 수정 : 2015.10.23 14:22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과거의 영화가 아이들을 다루는 방식을 벗어남으로써 현실성을 획득했다. 이지원(왼쪽), 이레 등의 호연도 이를 뒷받침했다.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개봉한 지 한달 보름 만에 재개봉을 하는 영화가 있다. 자사 제작 대작 영화들에 최대한 많은 스크린을 배당하겠다는 멀티플렉스들의 반칙 때문에 개봉 3주 만에 대부분의 스크린에서 밀려났던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2014·이하 <개훔방>) 이야기다. 그사이 배급사 대표는 공정한 경쟁을 해볼 기회조차 빼앗기는 현실을 규탄하며 대표직을 사임했고, 관객들과 영화계 관계자들의 지속적인 항의와 문제 제기, 영화계 ‘갑질’ 논란이 뒤를 이었다. 논란 끝에 <개훔방>은 결국 2015년 2월12일 전국 44개 스크린에서 정식으로 ‘재개봉’하는 데 성공했지만, 2001년 ‘와라나고 운동’(<와이키키 브라더스>, <라이방>, <나비>, <고양이를 부탁해> 네 편의 소규모 한국 영화를 지지하는 관객들이 벌인 작은 영화 살리기 운동) 이후 14년이 흐르도록 자본의 논리로 작은 영화들이 밀려나는 광경은 변한 게 없는 듯해 마음 한켠이 서늘하다.

작품 외적인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개훔방>을 극장에서 관람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논하며 당위를 설득하는 글이라면 이미 훨씬 더 잘 쓰여진 글들이 많이 나왔다. 영화가 그렇게 빠른 속도로 스크린에서 밀려날 줄 모르고 방심하다가 글을 쓸 타이밍을 놓친 나는, 재개봉으로 다시 얻은 이 천금 같은 기회를 온전히 <개훔방>이 얼마나 잘 만들어진 영화이며 배우들의 연기가 얼마나 빛났는지 이야기하는 데 할애하고자 한다. 영화가 충분히 음미되고 논의될 시간조차 없이 위기를 맞이한 탓에, <개훔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좋은지에 대한 이야기는 당위를 설파하는 글에 비해 그 수가 적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세상 어떤 관객이 오로지 당위와 의미만으로 영화를 선택한단 말인가.

영화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갑작스레 닥쳐온 가난 때문에 집을 잃고 졸지에 승합차에서 살게 된 열살 소녀 지소(이레)는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기로 결심한다. 집을 마련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일주일만 차 안에서 살자고 해놓고선 한달 넘게 승합차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 걸 보니 엄마(강혜정)는 믿을 구석이 못 되고 집을 훌쩍 나간 아빠는 돌아올 줄 모르니까. 부잣집 개를 훔치고, 개를 찾는다는 전단지가 붙으면 자신이 찾은 척 개를 돌려주고 사례비를 받아 ‘평당’에 있다는 500만원짜리 전셋집을 구하리라. 지소는 단짝 친구 채랑(이지원)과 남동생 지석(홍은택)과 함께 노부인(김혜자)이 애지중지하는 개 월리를 훔치지만, 노부인의 재산을 노리는 조카 수영(이천희)이 끼어들면서 일은 생각보다 복잡해진다.

아역배우 이레는 섬세한 표현으로
성인 연기자들과 호흡을 완성했다
채랑 역의 이지원은 유머감각으로
극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김혜자와 최민수는 넘치는 일 없이
적절한 균형을 맞춘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영화 중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전체관람가 영화들은 종종 비슷한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아이들이 보는 작품이란 이유만으로 인물과 세계관 구축에 공을 덜 들이는 것이다. 아이들을 “한없이 순수하고 착하며 귀여운” 존재로만 그리거나, 이분법적인 선악 구도로 만들어진 평면적인 세계 안에 아이들을 던져놓고 다짜고짜 ‘정의를 위해’ ‘신나는’ ‘모험을 떠나’는 내용만으로 일관하는 구성. <개훔방>은 이런 실수들을 조심스레 피해간다. <개훔방>의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동정이나 시혜를 요구하며 애교를 부리지도 않고, 아이들이 헤쳐나가는 세상 또한 선과 악으로 명쾌하게 나뉘지 않는 복잡한 세계다. 일단 주인공 지소부터가 ‘평당 500만원’을 ‘평당’이란 지역에 있는 500만원짜리 전셋집으로 이해할 만큼 순진하면서도, 동시에 ‘아무도 다치지 않는 납치’를 꿈꾼다는 점에서는 <복수는 나의 것>(2002)의 영미(배두나)와 크게 다를 게 없는 인물이 아닌가. 물론 지소가 영미처럼 냉혹한 결말을 맞이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어린아이가 저지른 실수란 이유로 모든 것을 용서받으며 넘어가지도 않는다. <개훔방>은 어린 관객들이 보는 영화라고 해서 아이들을 무시하거나 적당히 봐주는 대신 아이들을 동등한 주체로 대우해준다.

인물 구성에서도 <개훔방>은 냉정함을 잃지 않는다. 영화는 주인공인 지소, 지석, 채랑에게 무게중심을 싣고 있지만, 아이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김혜자, 최민수, 강혜정, 이천희 등의 성인 연기자들을 배경으로 소비하는 일도 없다. 강혜정이 연기한 철없지만 자존심 강한 엄마나,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고 스스로 고립된 노부인, 돈 많고 까칠한 고모의 시중 노릇에 지쳐 음모를 꾸미는 수영, 세상 어디에든 묶이지 않고 자유롭게 떠돌지만 딸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한 노숙자 대포(최민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등장인물은 자신만의 동기와 서사를 충분히 갖추고 움직인다. 이들이 저마다 다른 목적과 방향으로 활발하게 움직여준 덕분에 영화 속 세계가 더 현실감을 갖추게 된 것은 물론, 각각의 어른들을 상대해가며 납치극을 성공시켜야 하는 지소 일행의 모험담은 더 입체적인 구조를 지닐 수 있게 되었다.

줄거리에 엄청난 클라이맥스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개훔방>은 등장인물들의 감정 흐름에 집중한다. 그 덕에 주인공인 아역배우들의 중요성이 필연적으로 커졌는데, 극의 중심에 있는 지소 역의 아역배우 이레는 섬세한 감정 표현으로 성인 연기자들과의 호흡을 완성했다. 배역의 특성상 지소는 끊임없이 어른들과 일대일로 맞붙는다. 이레는 체념과 원망의 눈빛으로 엄마에 대한 지소의 애증을 보여주는가 하면, 몸의 미세한 경직과 절박한 말투를 교차해 활용하며 노부인을 속이기 위한 지소의 허장성세를 연기한다. 인물의 복잡다단한 감정을 효율적이고도 절제된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자존심 강하고 속 깊은 지소를 연기하며 이레가 순간순간 보여주는 결기에 찬 눈빛과 단호한 어조는, 촬영 당시 아홉살이었다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지소 역의 이레가 극의 중심을 지탱하는 동안, 단짝 친구 채랑 역의 이지원은 냉소적인 유머감각으로 극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친구의 무거운 비밀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고 괜찮다 말해주는 장면. 승합차에 사는 것을 들킨 지소가 “이제 나랑 다니는 게 쪽팔릴 거야”라고 말하자, 채랑은 “엄마랑 다니는 게 더 쪽팔”린다고 쿨하게 대꾸한다. 무심하게 생수병을 만지작거리며 반쯤 포기한 말투로 한숨 쉬듯 대사를 읊는 이지원의 연기는 지소뿐 아니라 관객들까지 안심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지소 일행의 범죄가 본격화되면서 채랑은 어른들을 속이거나 어르고 달래어 가며 자신들의 계획의 일부로 포섭하는데, 이지원은 딱딱 끊어지는 하이톤의 말투와 상대를 꿰뚫어 볼 듯한 눈빛으로 채랑의 엉뚱하고 당돌한 면모를 유쾌하게 담아냈다.

아역배우들이 이렇게 선명하게 제 색깔을 낼 수 있었던 것은 혼자서도 스크린 전체를 장악할 만한 카리스마를 지닌 대배우들이 어깨에 힘을 빼고 앙상블을 완성한 덕이 크다. 각각 <마더>(2009)와 <홀리데이>(2005) 등의 대표작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준 바 있는 김혜자와 최민수는 <개훔방>에서는 누구 하나 넘치는 일 없이 적절한 균형을 맞춘다. 김혜자는 차갑고 냉정한 첫 등장 장면에서 뒤로 갈수록 온기를 되찾는 노부인의 캐릭터 폭을 미세한 표정 변화만으로도 풍부하게 표현하는데, 수십년간 연마된 배우의 얼굴은 별다른 특수효과 없이 그 자체로도 스펙터클일 수 있다는 점을 너끈히 증명한다. 현장에서 아역배우들과 어울리며 ‘집에서 연습해온 뻔한 연기가 아닌 자연스러운 연기’를 이끌어냈다는 최민수 또한 인상적이다. 최민수는 토크쇼 프로그램 등을 통해 보여줬던 실제 모습을 연상시키는 자유롭고 넉넉한 필체로 아이들의 조력자인 노숙자 ‘대포’를 그려낸다.

이승한 티브이칼럼니스트
한국의 양대 명절 중 하나인 설 연휴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설이라고 가족과 집의 의미를 다시 곱씹어 보는 영화를 보자는 식의 상투적인 추천을 할 생각은 없다. 차례로 성룡(청룽) 영화와 조폭 코미디가 히트를 치던 시즌을 두고 ‘영화를 통해 가족의 의미를 곱씹기에 좋은 시기’라고 이야기하면 사기가 될 테니까. 다만 이런 이야기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설 연휴에 극장가를 찾게 된다면, 설 대목을 노리고 개봉한 수많은 대작 영화들이 스크린에 걸려 있겠지만 한번쯤은 이 글이 당신의 뇌리를 스치기를 희망한다. <개훔방>은 좋은 배우들과 좋은 연출이 만난 준수한 영화다.

이승한 티브이칼럼니스트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