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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9.11 19:33 수정 : 2015.10.23 14:15

최근 배우 윤은혜가 중국 방송의 패션 프로그램에서 선보인 흰색 코트의 표절 논란은 소속사 쪽이 표절 제기자의 행동을 ‘노이즈 마케팅’으로 단정하면서 더욱 증폭됐다. 최성열 <씨네21> 기자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전업 글쟁이가 되기 전인 2006년도 무렵의 일이다. 친구들과 작은 비영리 웹진을 운영하던 나는 당시 저평가되던 한 예능인을 변호하는 글을 썼다. 누군가 그를 변호해주길 기다리던 그의 팬들이 많았던 것인지, 내가 쓴 글은 금세 인터넷 곳곳에 퍼져나갔다. 여러모로 기쁜 일이었다. 딱 한가지만 빼면. 글이 인터넷 커뮤니티 곳곳에 퍼지고 며칠 뒤, 나는 내 글과 매우 흡사한 내용의 칼럼을 발견했다. 그때에도 유명한 연예기자였고 아직도 유명한 연예기자인 아무개가 쓴 연예칼럼이었다. 콕 집어 ‘이 문장을 고스란히 가져다 썼다’고 할 만한 대목은 없었다. 다만 글 전체의 논리 전개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순서는 심히 유사해 보였다.

내심 좀 불쾌했음에도 그땐 그냥 넘어갔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나는 아직 전업 글쟁이로 살 거란 생각 따윈 해본 적이 없는 스물세살 꼬마에 불과했다. 내가 어떤 권리를 침해당한 건지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마당에, 누구에게 뭘 어떻게 문제제기를 해야 하는지 알 리 만무했다. 몇 년이 지나 전업 글쟁이가 되고 난 뒤 불현듯 그 일이 떠올랐지만 역시 문제 삼지 않았다. 왜 이제 와 새삼 문제 삼느냐는 이야기를 듣게 될까 두렵기도 했거니와, 수년 전에 스치듯 보았던 칼럼을 어디서 다시 찾을지도 막막했다. 게다가 희미한 기억으로도 콕 집어 베꼈다고 주장하기 용이한 대목은 없었던 듯하니, 문제를 삼는 게 무익한 일처럼 보였다.

아마 그때 작정하고 문제를 삼았다 한들 입증은 불가능했으리라. 표절에 대한 판단은 보통 ‘접근 가능성’(혹은 ‘의거 관계’)과 ‘실질적 유사성’의 두가지를 근거로 삼는다. 표절 의혹을 제기당한 작가가 원전이라 지목된 작품을 사전에 접할 수 있었는지 여부가 ‘접근 가능성’이고, 두 작품의 표현 방식이 현저하게 유사하거나 본질적으로 동일한가의 여부가 ‘실질적 유사성’이다. 그가 칼럼을 쓰기 전 내 글을 보았을 거란 사실을 입증하는 것도 어렵거니와, 어찌어찌 입증에 성공한다 한들 단순히 그 예능인을 바라보는 관점이 유사했을 뿐 표현 방식이 달라 ‘실질적 유사성’이 없다고 해버리면 그만이었을 테다. 표절이라는 게, 의외로 작정하고 따지고 들어도 입증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상황이 이러니 표절 시비가 났다는 이야기는 무성해도 표절로 인정되었다는 이야기는 드물다. 있더라도 대부분 의혹을 제기당한 사람이 순순히 유사성을 인정하는 사례지, 한국 법원에서 표절이라 판결을 내리는 경우는 손에 꼽을 만하다. 대체로 실질적 유사성을 따지는 단계까지 가기 전에 접근 가능성부터 부정하는 경우들이 허다한데, 밴드 와이낫의 ‘파랑새’(2008)와 씨엔블루의 ‘외톨이야’(2010)의 사례에서도 법원은 홍대의 터줏대감이자 클럽 타의 운영자인 와이낫을 “이 사건 표절 논란으로 언론에 등장하기 전까지는 대중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무명밴드”라 판단해 접근 가능성을 부정한 피고의 주장을 인용한 바 있다. 신경숙처럼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1961)을 읽어본 사실이 없노라 주장하고도 <우국>과 <전설>(1996) 사이의 실질적 유사성을 부정하기 어려워 “표절이란 문제제기를 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애매한 표현을 남기고 자숙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야, ‘접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베끼겠느냐’는 항변은 그 힘이 세다.

과거에 해당 브랜드의 옷을
협찬받았던 적이 있었고
스타일리스트도 최근까지
협찬을 목적으로
옷을 빌려갔던 적이 있었으니

혹시라도 영향받은 게 아니었을까
스스로를 의심해보는 것이
먼저였어야 할텐데

그는 왜 그렇게 단호하게
일말의 가능성조차 부인해
돌이킬 수 없게 만들었을까

문제는 사람의 기억이란 게 얄궂어서, 종종 뻔히 봤던 작품임에도 그 사실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최근 단편 <낮잠>(2007)에 대한 표절 의혹을 제기당한 소설가 박민규는 처음엔 한 시사월간지에 의혹을 제기한 평론가들에게 노골적인 불쾌함을 표출하는 글을 기고했으나, 바로 며칠 뒤 같은 매체에 연락해 자신이 원전으로 지목된 만화 <황혼유성군>(1995)을 읽은 적이 있다고 정정한 바 있다. 내친김에 오래전부터 제기되어왔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2003)의 ‘거꾸로 보는 한국 야구사’ 무단도용에 대한 입장도 더 명확하게 밝혔다. 뒤늦게나마 접근 가능성을 인정하고 <낮잠>과 <황혼유성군> 사이의 유사점을 다시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은 용기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박민규가 얼마나 정중한 태도로 사과를 했는가 하는 점과는 별개로, 그가 처음 표절 의혹을 제기당한 직후 본인 표현대로 “분노와 적개심과 막말”을 퍼부었다는 사실을 돌이킬 수는 없다.

“나는 베끼지 않았는데 부당하게 표절 의혹을 샀다”는 입장은, 그것이 진심이든 아니든 종종 감정적이고 적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낸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상대에 대한 적개의 정도로 증명하는 식의 반응. 김진의 <바람의 나라>(1992~)를 표절했다는 의혹을 제기당했던 <태왕사신기>(2007)의 송지나 작가는 “만화라는 매체는 어린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것”이라며 만화 장르 전체를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하고 “인터넷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팬들에게 나눠줄 사례비가 필요했던 것이냐” “판단력이 정확지 않은 어린 팬들을 조종하여 본인의 홈페이지에 유도질문을 올리고”라고 하는 등 김진 작가가 팬들을 사주해 의혹 제기를 진행 중이라는 식의 발언을 해서 <바람의 나라> 팬들을 분노케 한 바 있었다.

이런 날 선 반응, 최근에도 본 적이 있다. “자사의 브랜드를 홍보하기 위해 윤은혜라는 이름을 도용하지 않기를 바라는 바다.” 중국 동방위성티브이 서바이벌 리얼리티 <여신의 패션> 시즌 2에서 배우 윤은혜가 선보인 흰색 코트가 윤춘호 디자이너의 2015년 가을·겨울(FW) 컬렉션을 따라 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사자, 윤은혜의 기획사 쪽에서 내놓은 해명문의 마지막 문장이다. 강경하고 단호한 어조가 의혹을 잠재워줄 것이라 생각했을진 몰라도, 상황은 더 험악하게 흘러가고 있다. 처음 두 코트 사이의 유사점을 비교하는 사진이 올라왔을 때에도 이미 세간의 시선이 싸늘했는데, 상대의 의도가 노이즈 마케팅일 것이라 단언하는 마지막 문장에서 더 많은 이들이 분노한 것이다. 이미 같은 프로그램에서 선보인 네 벌의 옷 중 흰색 코트를 포함한 세 벌의 옷에 대해 새롭게 표절 의혹이 제기되는가 하면, 과거 문화방송 드라마 <궁>(2006)에서 윤은혜가 직접 그린 것이라 알려졌던 실내화 그림 또한 당시 드라마의 미술을 담당했던 박정미씨의 작품이었단 사실까지 새삼 밝혀졌다. 이제 와 상황을 원만하게 돌이키기엔 그는 너무 먼 곳까지 가버렸다.

일각에선 상습적이고 반복적인 거짓말을 스스로도 믿어버리는 ‘리플리 증후군’을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의사가 아닌 언론이 누구에게 정신병리학적 진단을 내리는 건 무리일 게다. 다만 안타까운 점은 선의에 선의를 얹어 백보 양보해 그가 의도치 않게 이런 결과를 냈다 하더라도 왜 그렇게 단호하게 일말의 가능성조차 부인해 상황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들었을까 하는 점이다. 이미 그가 과거에 해당 브랜드의 옷을 협찬받았던 적이 있었다는 점도 밝혀졌고, 함께 서바이벌에 참여 중인 스타일리스트 또한 최근까지 협찬을 목적으로 옷을 빌려갔던 적이 있었으니, 혹시라도 영향을 받은 게 아니었을까 스스로를 의심해보는 것이 먼저였어야 했으리라. 한번 부정한 사실을 뒤늦게 인정하는 데에는 처음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한 법이고, 거기에 폭언까지 취소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수습이 더 어려워질 테니 말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한 차례 피해자의 자리에 서본 터라, 나는 글을 쓸 때면 늘 “혹시 내가 어디서 본 글을 부지불식중에 따라 쓰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공포에 시달린다. 실제로 의도한 적은 없으나 쓰고 보니 어딘가 모르게 다른 글과 비슷해 보여 해당 저자에게 연락해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촌극을 벌인 적도 몇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상대는 너그럽게도 유사점이 커 보이진 않으며 글을 쓰다 보면 다른 글들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고 이야기해주곤 했지만, 그런 말들이 근심을 잠재워주진 않았다.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와 더불어 “내가 누군가를 베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지금도 날 끈덕지게 쫓아다닌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간 그저 고통스럽다고만 생각했던 그 공포야말로 무언가를 창작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윤리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공포가 표절을 저지르는 일로부터 당신을 막아줄 것이고, 최악의 경우에라도 늦기 전에 수긍할 용기를 줄 테니 말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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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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