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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1.06 20:41 수정 : 2015.11.07 09:46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박나래
지난 10월31일 방영된 문화방송 <마이 리틀 텔레비전>, 장도연과 박나래가 진행한 분장 쇼는 웃음에 대한 의욕이 과했던 탓에 거의 대부분이 편집으로 잘려나갔다. 인터넷 방송에 최적화된 파괴적인 언어 구사나, 완급 조절 없이 쉬지 않고 달리는 분장의 연속을 그대로 지상파 방송에 냈다간 피디가 양복을 차려입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출석해야 할 판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데도 인터넷 생방송 당시 실시간 시청률로는 2위를 차지했으니, 연출자 입장에선 이게 왜 2위인지 시청자들에게 설명해야 했던 상황. 제작진은 실시간 인터넷 커뮤니티의 뜨거운 반응이라며 몇몇 댓글을 소개했다. 인터넷의 생생한 반응이 살아 있는 댓글들, 개중 가장 충격적인 댓글은 역시 이거였다. “박나래방 나중에 녹화본(인터넷 생방송 실황을 녹화해 불법 공유한 파일)으로라도 보세요.” 지상파 방영분에 미처 다 담기지 못한 내용을 궁금해하는 이들이 실황 녹화본 파일을 공유하는 거야 공공연한 비밀이라지만, 제작진이 손수 ‘녹화본이 더 재미있으니 챙겨 보라’는 댓글을 공공연히 소개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상파 수위 고려않고 놀아댄
‘마리텔’ 분장쇼 대부분 편집
제작진도 ‘실황 녹화본’ 권할 정도
지독한 수위의 코미디 전무후무

자신의 ‘섹드립’ 더럽다 표현 자신감
여자 연예인 가두던 ‘이중잣대’ 무시
세상에 보낸 당당한 선전포고 의미

욕설과 비속어가 난무했지만
애먼 타인 비하나 공격은 없어
승승장구 예언은 시기상조지만
지금 이순간 가장 ‘단단한 사람’

인터넷 생방송을 못 봐 “대체 어땠길래” 싶을 이들을 위해 요약하자면, 이들은 애초에 지상파 방송 수위에 맞출 생각 따윈 안 한 이들처럼 정신없이 놀다 갔다. 실제로 인터넷 방송 경험이 있는 박나래는 오디오가 비지 않도록 쉬지 않고 떠들어야 생중계에 참여하는 네티즌들을 장악하기 쉽단 점을 잘 알고 있었고, 조금만 방심하면 훅 하고 들어오는 비속어와 거센 표현의 향연은 그간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는 접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 와중에 대머리 가발을 쓰고 나와서는 황재근부터 시작해 홍석천과 간디를 거쳐 <오스틴 파워>(1999)의 닥터 이블과 미니미 분장을 지나 <미니언즈>(2015)의 미니언과 <진격의 거인>(2013) 속 거인에 이르기까지 독한 분장 쇼를 선보였으니, 눈과 귀 모두 충격과 공포의 향연이었던 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티브이엔 <코미디 빅리그>를 통해 꾸준히 분장 코미디를 선보여왔던 장도연과 박나래지만, 앉은자리에서 쉬지 않고 대여섯 번의 변신을 연속으로 보여준 건 전무한 일이었다. 한국 여자 예능인이 이렇게 지독한 수위의 코미디로 방송에 임한 것도 전무하긴 매한가지다.

사실 어느 정도는 예견되었던 일이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 생방송을 몇 주 앞두고 방영된 문화방송 <라디오스타>, 박나래는 자신의 ‘섹드립’(성적 코드를 기저에 깐 농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안영미가 좀 색(色)한 느낌이 있다고 한다면, 저의 섹드립은 그냥 ‘더러워요’. 밑도 끝도 없이 더러워요. 그래서 방송에 못 씁니다!” 너무도 당당하고 차분한 말투로 자신의 수위를 ‘더럽다’고 표현하는 자신감. 박나래는 한국 여자 연예인들이 종종 갇히곤 하는 이중잣대를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남자 연예인들이 방송에서 독한 분장을 선보이거나 수위가 아슬아슬한 농담을 하면 재미있다고 박수를 치면서도, 여자 연예인이 똑같이 행동하면 ‘그래도 여자가 저렇게 말하고 행동하면 되나’라며 조신할 것을 요구하고 ‘여자인데 예뻐 보이고 싶지 않으냐’며 ‘직업정신이고 뭐고 지금의 너는 안 예쁘다’는 메시지를 굳이 꼭 전하고야 마는 한국 사회의 오래된 이중잣대. 박나래는 ‘더럽다’는 말 한마디로 ‘난 그 잣대 따를 생각 없으니 알아서 하라’는 선전포고를 대신했다. 그랬으니 아예 인터넷용으로 일관한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야 어땠으랴. 분장용으로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가는 길, 박나래는 아예 이렇게 외치고 시작했다. “자, 이제 홀딱 벗고 놀아보는 거야!”

박나래라고 그 이중잣대에 발목을 잡혔던 적이 없었으랴. 작년 10월 스토리온 <트루 라이브 쇼>에 이국주, 장도연과 함께 출연한 박나래는 “여자인데 망가지는 개그를 하는 것이 부담스럽진 않으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런 시점이 오는 것 같아요. 개그우먼으로 활동하다 5년에서 6년 정도 되면, 개그우먼으로 살 것인지 아니면 여자로 살 것인지에 대한 선택을 강요받는 순간이 와요.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일 수도 있어요.” 살을 찌우고 분장을 했더니 제작진으로부터 “비호감”이라는 힐난을 듣고, 기껏 귀여운 이미지로 노선 변경을 해보려 성형수술을 하고 부기를 빼고 돌아갔더니 동료들로부터 “생긴 게 애매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방황하던 시절은 분명 즐겁지만은 않았다.

이도 저도 아닌 게 될 것만 같은 순간, 박나래는 그저 꾸미지 않고 원래 자기 자신을 보여주는 쪽을 택했다. 수술 뒤 한국방송 <개그콘서트>에 복귀해서 선보인 코너는 예뻐진 얼굴의 이점을 살리는 코너가 아니라, 수술 전에 그랬듯 분장과 독한 의상으로 승부를 거는 ‘패션 넘버 파이브’였다. 진정한 건강검진복 패션을 보여준다며 뼈다귀만 앙상하게 그려진 스판덱스 옷을 입고 나오고, 호신술 패션을 선보이는 회차에선 아예 거대 샌드백으로 분장해 “에스(S)라인의 시대는 가고 아이(I)라인의 시대가 왔다”고 일갈하는 독한 코미디. <코미디 빅리그>로 이적한 뒤에 선보인 일련의 코너들 또한 마찬가지다. 회차를 더할수록 분장 코미디의 한계를 파괴하고 있는 코너 ‘중고 앤 나라’에서, 박나래는 마동석으로, 밴드 ‘혁오’의 리더 오혁으로, 심지어는 송해로 분장하고 등장해 객석을 압도한다.

강요당한 양자택일에서 ‘여자’가 아니라 ‘개그우먼’으로 사는 길을 택한 걸까? 그렇지 않다. <트루 라이브 쇼>에서 박나래는 자신의 성형에 대해 이렇게 부연한다.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 했다기보다는, 저 스스로 자신감이 무척 많이 생겼어요. (성형 전엔) 저도 모르게 콤플렉스가 있었나 봐요. 의기소침해지고. 하지만 (성형 후인)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독한 개그를 하는 것은 자신의 직업이고, 비록 ‘애매하다’는 평을 듣더라도 수술을 통해 콤플렉스를 극복한 외모는 아름답다 자부한다. 양자택일을 강요당하는 것이 허망하단 사실을 깨달은 순간, 양자택일 대신 일과 자존 모두를 포기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박나래는 <라디오스타>에서 자신을 ‘미녀 개그우먼’이라고 소개하고, <트루 라이브 쇼>에서는 몸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남기고 싶다며 누드 화보에 대한 욕심도 내비친다. 예쁘면서 세면 안 되느냐고 반문이라도 하듯이.

자존이 튼튼한 사람은 웃음을 위해 남을 비하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 생방송 내내, 박나래와 그의 파트너 장도연이 구사한 거친 언어 속에서 애먼 타인에 대한 비하나 공격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온갖 욕설과 비속어는 그 말을 꺼낸 자기 자신이나 서로 농담을 주고받기로 양해가 되어 있는 상대방을 향할 뿐, 애꿎은 이들을 호명해 조롱하는 쉬운 방식으로 웃음을 쥐어짜진 않은 것이다. 아무렇게나 난사한 것 같은데 정신 차리고 보니 정확하게 표적에만 총알을 꽂아 넣은 명사수처럼, 비록 언어의 수위가 높아 방송에는 못 내보낼지언정 남 욕은 하지 않는 토크라니. 분장 쇼를 선보이는 내내 박나래와 장도연이 강조했던 말도 허언이 아니다. “저희가 보기엔 이래 보여도 토크형 코미디언이거든요.”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물론 박나래가 앞으로도 무탈하게 승승장구할 거라 말하는 건 시기상조일 것이다. 여전히 그가 구사하는 농담의 수위는 아슬아슬하고, 아무리 남을 향한 것이 아니라 해도 욕설과 비속어 자체에 담긴 차별적인 함의는 보는 이에 따라선 불쾌할 수도 있다. 유독 여자 연예인의 언행에 더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한국 연예계의 고질병이 언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도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박나래가 그 어떤 한국 여자 예능인도 가본 적 없는 최전선에 서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토크의 수위든 분장의 강도든 이렇게 센 코미디를 구사하는 사람도 없었고, 이렇게 경악할 만큼 건강한 자존을 뽐내는 이도 없었으니까. 지난 9월 <일간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단단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누군가 저를 아무리 ‘까고’, 짓궂은 장난을 걸고, 센 멘트로 공격해도 ‘박나래한테는 괜찮아’라는 이미지를 얻고 싶어요.” 그가 얼마나 더 멀리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 몰라도, 지금 이 순간 박나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단단한 사람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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