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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01 09:19 수정 : 2019.06.01 09:25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오브더티브이
파일럿 농촌예능 ‘가시나들’

한글 배우는 농촌 할머니 다섯
경남 함양 배경 리얼리티 예능
연예인 짝꿍들은 한글 학습 돕고
어른짝꿍들은 삶의 지혜 알려줘

있는 그대로 삶의 이야기 매력
자극적 멘트, 빠른 속도 편집 없이
‘지속가능한 재미' 가능성 보여줘

문화방송(MBC)의 4부작 파일럿 예능 <가시나들>은 노년의 농촌 여성 5명이 연예인 짝꿍들의 도움을 받아 한글을 배워가는 과정을 신선한 예능 문법으로 담아냈다. 문화방송

종종 “어떤 예능 프로그램이 좋은 예능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오랜 시간 티브이 예능 프로그램들에 대해 말을 얹고 살아온 탓에 겪는 일인데, 때로 질문의 어조가 도발적일 때도 있다. 뜨끔하지만 어쩌랴. 남의 창작물을 품평하는 것으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의 숙명이다. 나 또한 주례사 비평을 피한다고 단호한 문투로 써내려간 혹평이 많았던 터라, 그런 질문을 받으면 성의껏 대답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럴 때면 꼭 말이 길어지고, 길어지면 비장해지고, 길고 비장한 문장은 반드시 꼬인다.

도시 중심에서 시골 중심으로

만일 문화방송(MBC) 4부작 파일럿 예능 <가시나들>이 정규편성에 성공한다면, 앞으론 같은 질문을 받아도 답하는 일이 조금은 수월해질지 모른다. 김재환 감독의 다큐멘터리 <칠곡 가시나들>에서 영감을 받아 그 연작으로 기획된 <가시나들>은 경남 함양의 ‘문해학교’를 배경으로 삼은 리얼리티 예능이다. 프로그램은 70대에서 80대 사이의 농촌 여성 다섯 명이 한글을 읽고 쓰는 법을 배우는 과정을 따라가는데, 이 다섯 학생 옆에 짝꿍으로 가수 이브(이달의소녀), 최유정(위키미키), 수빈(우주소녀), 우기((여자)아이들)와 배우 장동윤을 앉혀 독특한 케미스트리를 쌓아 올린다. 젊은 ‘애기짝꿍’들이 한글 학습을 돕는다면, ‘어른짝꿍’들은 이들에게 삶의 지혜를 알려주는 것이다. 이 교환학습을 지도하는 선생님은 교육학을 전공한 배우 문소리이고, 가수 육중완 또한 ‘청년회장’이란 명목으로 학교 청소나 어르신 학생들의 잔심부름을 돕는다.

개요만 보면 <가시나들>도 농촌을 다룬 여타 프로그램과 다른 게 없을 것 같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이 프로그램은 그 문법부터 조금은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가시나들>은 흔히 농촌을 “삶에 지친 도시인들이 한 호흡 쉬며 힐링하고 갈 수 있는 푸근한 공간” 정도로 대하던 도시 중심적 시선을 비켜간다. <가시나들>은 산도 높고 골도 깊은데 대중교통 인프라는 열악해서 학교에 가려면 한 시간에 몇 대 오지 않는 시내버스 시간에 맞추기 위해 걸음을 서둘러야 하는 현실이나, 낫으로 잡초를 베고 찬물에 쑥을 하염없이 씻는 육체노동 없이는 단 한 끼니도 먹을 수 없는 농촌의 압도적인 노동량에 사탕발림을 하지 않는다. 도시에서 온 애기짝꿍들에게 푸근한 할머니들이 있는 함양은 따뜻한 곳이겠으나, 동시에 어른짝꿍들에게 함양은 엄연한 삶의 터전임을 존중하는 것이다.

시점을 ‘도시 중심’에서 ‘함양 중심’으로, 주인공의 자리를 ‘농촌을 체험하는 도시인’이 아니라 ‘현지에서 살아가는 노년 여성’으로 옮기자, 자연스레 편집의 리듬도 전에 없이 새로워졌다. 어른짝꿍들이 대답을 하기 전에 생각을 고르느라 잠시 침묵하는 순간이나, 카메라 앞이 어색해 아무 멘트도 없이 카메라를 응시하는 순간들, 아주 느릿느릿 글씨를 써내려가는 순간들은, 다른 예능이었다면 아마 특별한 내용 없이 시간을 소비한다는 이유로 편집되었을 장면들이다. 그러나 시점을 옮기자 그 모든 장면들 또한 의미를 얻고 편집에서 살아남는다. 노년 농촌 여성들의 리듬에 맞춘 덕분에 <가시나들>은 기존의 예능에선 보기 힘든 느릿하지만 엇박자인 독특한 리듬을 갖추게 되었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은 어떤가. 학교에서 하교해 집에 도착한 박승자씨는 티브이를 켠다. ‘시골에 계신 어르신들이 보는 프로그램들이 뻔하지’라는 생각으로 무방비 상태로 화면을 보던 시청자들은, 박승자씨가 즐겨 보는 프로그램이 다름 아닌 미국 프로레슬링 더블유더블유이(WWE) 중계이고, 그가 콕 집어 응원하는 선수도 있다는 사실에 당황한다. 노년 농촌 여성에 대해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편견이 깨지며 생기는 의외의 재미인 셈이다.

예상을 깨는 의외의 장면들로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내니, 굳이 자극을 추구하거나 속도감 있는 편집을 택하지 않더라도 지속가능한 재미를 확보할 수 있다. 누가 더 ‘센’ 멘트를 치고 더 자극적인 이야기를 하는지의 경쟁을 추구하면 그 어떤 신선한 포맷도 빠른 속도로 그 매력을 소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렇게 전혀 다른 문법의 게임을 들고 오면 자연스레 게임의 룰도 달라진다. 느리지만 빨리 소진될 일 없는 은근한 즐거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가시나들>은 지속가능한 아이템으로서의 가능성뿐 아니라, 엔터테인먼트계의 최신 트렌드인 ‘슬로 콘텐츠’로서의 가치 또한 획득한다.

오답은 없어

이렇게 시점과 주인공의 자리를 옮기는 일은 기술적인 측면의 완성도만 더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의 깊이 또한 더한다. <가시나들>은 학생들이 가끔씩 철자를 틀리거나, 문제가 요구하는 답이 아닌 이야기를 해도 그걸 함부로 틀렸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일평생 농촌에 산다고, 글을 모른다고, 집에서 살림을 산다고, 여성이라고 유무형의 형태로 발언을 제약당해 왔을 학생들에게 쉽게 ‘틀렸다’고 이야기하는 일이, 혹시라도 그들을 주눅 들게 만들어 다시 익숙한 침묵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건 아닐까 염려하는 것이다. <가시나들>은 주인공인 문해학교 학생들이 살아온 삶을 쉽게 동정하거나 평가하는 대신, 그들과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한 지붕 아래 잠을 청하며 그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의 시야로 본 세상은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는 길을 택한다.

대등한 자리에서 친구가 되어 존중하는 태도는 이런 식으로 빛난다. 의태어 ‘두근두근’이란 답을 얻기 위해 “할머니, 여행 가기 전에 가슴이 어때?”라고 묻는 수빈에게, 짝꿍 박무순씨는 “그 약을 묵고 댕기지!”라고 답한다. 질문이 원했던 답은 당연히 아니지만, <가시나들>은 그를 오답이나 엉뚱한 답이라 말하는 대신 자막으로 ‘정확한 설명!’이라 수식한다. 노년 인구의 삶에서 ‘여행 가기 전 가슴’은 두근거리는 게 아니라 탈이 나면 안 되기에 미리 약을 먹어 챙겨야 할 장기 중 하나다. 최소한 그들의 삶 속에서 박무순씨의 답은 정확한 답인 셈이다. 동시에 어른학생들이 가수 김연자의 노래 ‘아모르 파티’ 가사를 자신들 나름대로 다시 써보는 수업에서, 다가올 사랑이 ‘고생길’이라면서도 결혼은 ‘꼭 해’야 한다는 어른학생들의 말을 <가시나들>은 ‘의견’이라고 서술한다. 그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쌓아온 관점을 존중하되, 그것을 반드시 따라야 할 원칙이라 말하는 대신 그들 나름의 ‘의견’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다양한 가치관이 존중되기를 바라는 방송의 성숙한 태도가 빛나는 대목이다.

<가시나들>이 완벽한 작품이라 말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한국 예능이 오랫동안 고질적으로 앓아오면서도 어떻게 극복하면 좋을지 답을 찾지 못했던 고민들에 대해 새로운 답을 제시하는 데 성공한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너무 많이 생산되어 이젠 사실상 동어반복에 가까워진 관찰 예능의 장르적 관성을 극복하고, 오디션 예능이나 리얼 버라이어티들이 추구해온 빠르고 자극적인 편집을 걷어내며 새로운 리듬감을 찾았다. 그 누구를 비하하거나 배제하는 일 없이 모두를 포용하면서, 그동안 주연의 자리에 설 일이 없었던 노년 농촌 여성들과 줄곧 보조적인 자리에 머무르던 젊은 여성 연예인들에게 포커스를 맞췄다. 교육과 도시의 인프라로부터 배제된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되, 절대 “많이 가지고 많이 배운 우리가 저들을 불쌍히 여겨 우리 눈높이로 끌어올려줘야 한다”는 식의 시혜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그러고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가시나들>은 건강한 방식으로 증명한다.

일요일 프라임타임에 편성된 것치고는 시청률이 그리 높지 않으니 <가시나들>이 정규편성 될 것이라 장담하긴 어렵다. 하지만 기껏 이토록 새롭고 포용적인 문법의 예능도 가능하다는 단초를 발견했는데, 그 가능성을 확인하는 선에서 그친다면 너무 아까운 노릇 아닌가. 나는 이 4부작짜리 파일럿 예능이 지금 이 순간 문화방송뿐 아니라 한국 티브이 예능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이라고 믿는다. 여기에, 우리가 아직 가보지 못한 미래가 있다.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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