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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12 09:31 수정 : 2019.10.12 09:51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오브더티브이
오디션 프로그램 시대의 종언

2017년 엠넷 ‘아이돌 학교’
예고편부터 연습생들 괴롭힘
‘프듀 엑스 101’ 투표 조작 의혹

‘조작 논란’ 연습생 이해인
탈락 뒤 제작진에 진실 요구
“실검 뜬 네가 승자” 답변

경찰 수사에서 <프로듀스 엑스 101> 방송에 공개된 연습생들의 최종 득표수와 실제 득표수가 다른 정황이 드러난 것으로 알려졌다. 출연자들이 무대에서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모습. 엠넷 방송화면 갈무리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위치한 ‘씨제이이엔엠’(CJ ENM) 센터 로비 한쪽 벽면에는 이재현 씨제이 회장이 한 말들이 끊임없이 영사된다. 대략 “선대 회장님(이병철)의 말씀을 따라 ‘문화가 없으면 나라도 없다’, ‘문화보국’이라는 신념으로 한국의 문화를 전세계와 나누기 위해 꾸준히 정진하자”는 요지의 이야기다. 자사가 제작한 영화와 드라마, 예능, 케이팝 콘텐츠가 세계인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제일제당이 만든 먹거리가 입을 매료시킨다는 자부심 어린 말들은 참 화려해서 보는 사람의 기를 죽이는 구석이 있다.

그 말들의 위세에 짓눌릴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면, 나는 조용히 2017년 엠넷(Mnet)이 방영한 <아이돌 학교>를 떠올린다. “춤이나 노래를 못 해도 좋으니 마음과 얼굴, 끼가 예쁜 사람들을 뽑겠다”면서 정작 ‘여성은 예뻐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강화하며 출발한 이 프로그램은, 예고편에서부터 연습생들을 학대하기 시작했다. 폐활량을 테스트한답시고 실내 풀장에 잠수를 시키고, 무대 위기 대처능력을 테스트한다며 교복 차림의 연습생들을 장대비 속에서 춤추게 하는 장면들은 엠넷이 그간 선보였던 오디션 프로그램 중 가장 질이 나빠 보였다. 뮤직비디오와 예고편에서 자꾸 집요하게 교복 차림의 여자 연습생들에게 물을 뿌리며 옷이 몸에 달라붙는 장면을 연출하는 속셈도 빤히 읽혔다.

그 무렵 나는 이 지면에서 엠넷이 선보이는 일련의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이 점점 인질극을 넘어 앵벌이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말하며 보이콧을 선언한 바 있다.(‘학대와 관음의 앵벌이…이게 ‘성장 드라마’라고?’ 2017년 7월15일치 <한겨레> 18면) 자신이 사랑하고 응원하는 어린 연습생 소년·소녀가 고통받는 광경을 보며 할 수 있는 유일한 구조행위인 투표를 해봐도 어차피 이벤트성 데뷔에 그칠 뿐, 정식 데뷔를 위해서는 또다시 서포트를 해줘야 하는 상황을 시즌마다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란 판단에서였다. 연습생을 훈련시켜 데뷔할 때까지 후원하는 건 팬들이 아니라 소속사가 해야 할 몫인데, 그 과정마저 상품으로 만들어서 팬들의 몫으로 떠넘기는 상술이 지긋지긋했다.

연습생 이해인의 폭로

문제는 그 상술마저도 사실상 팬들의 투표와는 별 관계 없는 협잡에 가까웠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는 점이다. <프로듀스 엑스 101>의 투표수가 조작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돼 ‘프듀 엑스 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하고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 수사도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프로듀스 엑스 101> 방송에 공개된 연습생들의 최종 득표수와 실제 득표수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정황이 포착된 것으로 전해졌다. 투표수 조작으로 탈락군에서 데뷔조로 순위가 뒤바뀐 연습생이 2~3명에 이르는데, 팀으로 데뷔할 수 있는 인원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데뷔할 수 있었으나 탈락하게 된 연습생 또한 2~3명에 이른다는 이야기다. 경찰 수사는 <프로듀스> 시리즈의 이전 시즌들을 비롯해 <아이돌 학교> 등 엠넷이 선보인 오디션 프로그램 전반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오래된 의혹을 확인한 사람들은 ‘그러면 그렇지’ 하고 절망한다. <아이돌 학교> 또한 방영 초반 1~2위를 다투던 연습생 이해인이 최종 11위를 기록하며 데뷔가 무산되자, 엠넷 쪽이 특정 학생의 투표수를 고의로 낮추고 누락시킨 게 아니냐는 의혹 제기가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때는 프로그램 자체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조용히 사라진 탓에, 엠넷 또한 의혹 제기에 대해 일체의 해명이나 반응을 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러나 2년이 지나 <프로듀스 엑스 101>의 투표 조작 사실이 밝혀진 뒤 마침내 지난 7일 당사자인 이해인이 입을 열었다.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을 통해 입장을 정리한 글을 발표한 것이다. “실제로 저는 조작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여부가 제 삶에 있어 그렇게 중요한 부분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라는 단서를 달고 조심스레 써내려간 글이었지만, 그의 글은 엠넷이 프로그램을 조작한 흔적으로 가득했다.

자신은 3천여명이 참여했다는 예심 공개 오디션에 참석하지 말라는 요청을 받았으며, 경연 무대는 당일에 갑자기 룰이 바뀌는가 하면, 어떤 팀은 라이브로 무대를 꾸려야 했는데 어떤 팀은 립싱크로 무대를 진행했다는 고발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심사를 맡은 이들에게서 ‘제작진이 너를 반대했다’며 미안하다는 말을 들었는가 하면, 드라마를 촬영하듯 아무 음악도 안 틀어놓고는 리듬을 타는 시늉을 해달라며 이미지 컷을 찍었다는 증언도 충격적이긴 매한가지였다. 이해인의 주장이 모두 사실이라면 엠넷은 열악한 시설과 엄격하게 제한된 외출, 개인 소지품을 반입하는지 몸수색을 하는 등의 인권침해를 견디며 프로그램에 참여한 연습생들을 데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그림을 만들기 위해 장난질을 친 것이다. 압도적인 갑의 지위를 남용해서 말이다.

이해인의 말을 종합하면, 최종 탈락 다음날 조작 논란에 대해 진실을 알려 달라고 요구한 이해인에게 제작진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가 실검(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떠 있지 않냐. 네가 더 승리자인 거다.”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에 앉은 어른들이 진실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기만하고 ‘네가 더 승리자’라는 식의 기만적인 말만 늘어놓는 상황을 겪었을 2017년, 그의 나이는 만 스물세살이었다. 대체 씨제이가 제일 잘한다는, 씨제이가 생각하는 ‘문화’란 무엇일까?

<아이돌 학교>에 출연한 연습생들이 옆으로 누운 자세로 한 손을 바닥에 댄 채 버티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뮤직비디오와 예고편에서 교복 차림의 여자 연습생들에게 물을 뿌리며 옷이 몸에 달라붙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엠넷 방송화면 갈무리

모두에게 더 많은 기회를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를 보면, ‘문화’는 이런 뜻을 지녔다.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 또는 생활 이상을 실현하고자 사회 구성원에 의하여 습득, 공유, 전달되는 행동 양식이나 생활 양식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하여 낸 물질적·정신적 소득을 통틀어 이르는 말. 의식주를 비롯하여 언어, 풍습, 종교, 학문, 예술, 제도 따위를 모두 포함한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어쩌면 씨제이가 <아이돌 학교>를 비롯한 일련의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보여준 일들 또한 한국의 ‘문화’인지도 모르겠다. 여성에 대한 성 상품화, 을에 대한 학대에 가까운 인권침해, 기회라는 재화를 극단적으로 적게 통제해 가격을 올린 뒤, 무한경쟁을 부추기며 그를 건강하다고 추앙하는 경쟁지상주의, 소비자들에게 끊임없이 구매와 투표를 독려하는 소비자본주의, 과정의 공정성이 사라져도 좋으니 원하는 결과만을 추구하는 성과주의까지. 역설적으로 씨제이야말로 한국 사회 전반에 ‘습득, 공유, 전달되는 행동 양식이나 생활 양식’을 제대로 선보이고 재생산해왔던 것이리라.

사람들이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을 옹호할 때 흔히 내세웠던 논리는, 그 포맷이 출발선의 불평등을 완화하는 순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형 기획사에 소속된 아이돌일수록 규모가 작은 군소 기획사 소속의 아이돌보다 더 많은 지원과 기회를 허락받는데, 아예 모든 경쟁 과정을 공개적으로 보여준다면 군소 기획사 소속의 연습생들 또한 보다 공정한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애초에 방송사가 더 많은 가수에게 더 많은 무대와 출연 기회를 제공하면 되지 않느냐”는 문장 하나만으로도 무기력하게 무너질 이 조악한 논리에 많은 사람이 마음을 주었던 건, 그만큼 ‘공정한 경쟁’이라는 가치에 목마른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찰 수사 결과 속속 밝혀지는 내용은 애초에 ‘공정한 경쟁’이라는 것 자체가 신기루였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기회 자체를 적게 잡아 놓고 경쟁을 조장하는 것 자체가 문제이고, 그 과정을 다시 상품화해서 이윤을 추구한 자본의 기획이 사악한 것이며, 그것이 오늘날 한국의 ‘문화’가 되게 두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이렇게 만천하에 공개됐다.

나는 경찰 수사 결과에 따라 관련자들이 처벌받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끝나도 괜찮은 걸까? 우리는 ‘데뷔’를 대가로 온갖 부조리와 인권침해로 가득한 경쟁을 견디라 말해온 오디션 프로그램 시대에 종언을 찍을 필요가 있다. ‘공정한 경쟁’이라는 신화를 거부하고 대신 ‘모두에게 보다 더 많은 기회’를 요구할 필요가 있다. 그것만이 또다른 이해인을 구하고 나아가 우리 자신을 구하는 길일 것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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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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