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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25 19:28 수정 : 2019.10.26 02:31

임상춘 작가가 쓴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은 주인공 동백이 폐쇄된 마을 공동체에서 가하는 억압을 극복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준다. 용식(왼쪽)과 동백이 마을의 한 길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다.<한국방송>(KBS) 누리집 갈무리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오브더티브이
<동백꽃 필 무렵>의 위험한 휴머니즘

말맛 좋은 사투리, 정감 가는 캐릭터
술집 운영 비혼모에 가해진 폭력에
너그럽게 면죄부…반성도 사과도 없어

드라마 초반 할 말 하던 동백 캐릭터
용식의 보살핌에 의존적으로 변해
멋대로 개입 남성상 ‘섹시한 수컷’

임상춘 작가가 쓴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은 주인공 동백이 폐쇄된 마을 공동체에서 가하는 억압을 극복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준다. 용식(왼쪽)과 동백이 마을의 한 길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다.<한국방송>(KBS) 누리집 갈무리

한국방송 <동백꽃 필 무렵>은 이래저래 매력이 많은 드라마다. <백희가 돌아왔다> <쌈, 마이웨이>의 임상춘 작가가 써 내려가는 충청도 말씨의 대사는 그 말맛이 좋아서 입안에서 거푸 따라 해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고, 어리숙한 듯 정감 가는 캐릭터들은 보는 이들을 무장해제하는 힘이 있다. 주인공 동백으로 분한 공효진의 연기는 애틋하고, 그를 향해 변함없는 순정을 바치는 용식 역의 강하늘이 선보이는 직관적이고 본능적인 연기는 든든하다. ‘사람 냄새 나는 작은 시골 공동체’에서 ‘팔자 센 여자’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과 배척이 얼마나 쉽고 악랄하게 자행되는지 탐구하는 스토리라인은 작가의 전작 <백희가 돌아왔다>의 연장선에 있는데, <백희가 돌아왔다>가 그랬듯 주인공이 결국 그 모든 억압을 뚫고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약속하는 카타르시스도 상당하다.

<동백꽃 필 무렵>의 가장 큰 장점이라 손꼽을 만한 인간에 대한 애정과 신뢰는, 동시에 <동백꽃 필 무렵>에서 제일 미심쩍은 구석이기도 하다. 그 애정과 신뢰를 지키기 위해 드라마가 적당히 눙치며 넘어가는 대목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을 보자. 연쇄살인범 까불이에게 위협당하는 동백이 옹산(마을 이름)을 떠나려 하자, 그간 동백을 대놓고 핍박하던 옹산 게장골목의 중년 여성들은 동백에게 이것저것 챙겨주지 못해 안달이 난다. 이들은 불과 직전까지 동백이 혼자서 술집을 운영하는 비혼모라는 이유 하나로 동네에서 얼굴도 못 들고 살게 하던 사람들이지만, 갑자기 알고 보면 속내는 순하고 정 많은 사람이었다는 식의 설명이 따라붙는다. 폐쇄적인 공동체가 한 개인에게 가했던 폭력에 대한 책임은, 어떤 반성이나 사과의 말 없이 허공으로 사라진다.

당당하던 동백이 용식을 만난 뒤

게장골목의 중년 여성들만 그런 게 아니다. 동백을 오해하고 그에게 분노를 퍼부었던 사람들 중 누구도 동백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는다. 옹산의 최고 엘리트인 변호사 홍자영(염혜란)은 자기 남편 노규태(오정세)가 동백과 불륜 관계라고 오인하고는 동백에게 모욕적 언사를 퍼부으며 가게를 빼라고 요구한다. 그리 오래지 않아 자영은 동백과 규태의 사이가 그런 관계가 아님을 깨닫고 동백 편에 서서 그를 돕는 태도의 변화를 보이지만, 자기가 이미 저지른 무례에 사과는 딱히 하지 않는다. 자기들이 한 일이 부당하게 가혹한 것임을 깨닫고 어물거리다가 태도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드라마는 등장인물들에게 그만하면 됐다는 듯 너그럽게 면죄부를 발부한다. 잘못된 인습과 오해가 한 사람을 철저하게 고립시킨다는 문제의식을 지닌 작품이, ‘오해할 만했다’는 식의 알리바이를 같이 제공하는 셈이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지키기 위해, 드라마는 사과를 듣지 못한 이들에게 먼저 너그럽게 용서할 것을 요구한다.

물론 이 작품은 일생을 주눅 든 채 살아온 탓에 제대로 된 사과를 요구하는 일에 서툰 동백 편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동백은 그 정도 태도 변화에도 상대의 진심을 너르게 헤아리고 용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처음 용식이 동백에게 반한 건, 동백이 경우가 아닌 일에는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할 말은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 아니었나? 드라마가 처음 시작할 무렵을 기억해보면, 분명 용식은 동백이 건물주 노규태에게 “두루치기 값에 제 손목 값이랑 웃음 값은 포함이 안 되는 거”라며 명확하게 선 긋는 모습을 보며 동백을 향한 연심을 굳혔다.

그런데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처음에는 그토록 단단하던 동백의 심지가 점점 물렁물렁해져서 용식의 끊임없는 개입과 보살핌이 필요한 지경이 된다. 연쇄살인마 까불이가 수년 만에 다시 등장해 동백을 위협한다는 이유가 제시되지만, 사실 동백이 이렇게 된 제일 큰 이유는 따로 있다. 용식과 동백을 맺어주기 위해서 용식은 히어로가 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동백에게 사실 자신이 강인하고 심지가 단단한 사람이란 사실을 일깨워주는 존재가 다름 아닌 용식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감을 잃고 살던 여자가, 순박하고 지고지순한 순정을 지닌 남자의 사랑과 헌신을 통해 자신이 귀한 사람임을 각성하고 행복을 되찾는다’는 스토리 구조는 비교적 타협적인 로맨스 문법이다. 고통받는 여자 주인공을 해방해주는 전통적 구원자로서 남자 주인공을 내세우면서도, 남자 주인공을 백마 탄 왕자님이나 키다리 아저씨로 그리는 대신 옆에서 응원해주는 조력자 위치에 세움으로써 여자 주인공의 주체성을 훼손하지는 않는 절충안인 셈이다. 그래서 용식은 동백에게 끊임없이 “멋지시다” “존경한다” “동백씨는 (기백의) 사이즈가 대(大)짜다” 같은 칭찬을 늘어놓으며 동백의 의사를 존중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선량함과 상대에 대한 존중 때문에, 시청자들은 동백을 향한 용식의 ‘직진’이 다소 스토커 같은 구석이 있어도 너그럽게 이해하며 넘어갔다.

그러나 드라마는 자꾸 동백의 약한 모습을 반복해 보여주면서, 용식에게 동백의 의사를 묻지 않고 직접 개입해 보살펴 달라고 요구한다. 처음엔 건물주에게도 할 말은 하던 동백이, 뒤로 가면 아들 필구(김강훈)가 야구 경기에서 부당하게 모욕당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용식이 개입할 때까지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된다. 다, 용식이 개입할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해 설계된 장면이다.

동백은 드라마 초반에는 할 말을 하는 캐릭터이다가 용식을 만난 뒤 끊임없이 보살핌을 필요한 인물로 변모한다. <한국방송>(KBS) 누리집 갈무리

착한 놈은 섹시하지 않다?

20회차에 방영된 잔치국숫집 장면을 보자. 자꾸 옹산에 들락거리며 자신과 필구에게 질척대는 종렬(김지석)과 담판을 짓기 위해, 동백은 종렬을 잔치국숫집에 데려가 술 한잔을 사이에 놓고 제 마음과 처지를 허심탄회하게 얘기한다. 용식은 동백이 현명하게 잘 결정할 일이라면서도 내심 불안해한다. 종렬에겐 동백의 전 애인이라는 역사와 필구의 생부라는 명분이 있고,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재력도 있으니 마음이 영 불안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동백의 엄마 정숙(이정은)은 용식에게 말한다. 그냥 내버려둘 거면 다 때려치우라고. 예의 차릴 거 다 차리고 뜨뜻미지근하게 착하기만 한 놈은 안 섹시하다고. 그 말을 들은 용식은 지금껏 한발 뒤로 물러서서 기다려왔던 시간을 반추하다가, 종렬과 만나고 있을 동백을 데리러 간다. 잔치국숫집으로 간 용식은, 종렬에게 더는 동백 근처를 어슬렁거리지 말라고 엄포를 놓고, 동백에게도 더는 어떤 이유에서든 종렬과 술을 먹거나 겸상하거나 종렬이 동백의 가게에 발을 들여놓게 하지 말라고 말한다.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동백이 종렬을 어떻게 대할지는 용식이 판단할 영역의 문제가 아니다. 자식 교육을 논의하기 위해 종렬을 만난다거나, 종렬이 억지로 쥐여준 돈을 돌려주기 위해 종렬을 만난다거나 하는 수많은 이유가 있고, 종렬과 관계는 동백이 알아서 판단하고 통제할 사안이다. 게다가 이미 동백은 종렬이 무엇을 하든 종렬을 다시 받아줄 마음이 없다고 확실하게 이야기해 놓은 상황이다.

그러나 <동백꽃 필 무렵>은 이 장면을 동백이 자력으로 제 의사를 관철하는 장면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대신 용식이 개입해 영역을 표시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섹시한’ 수컷으로 거듭나는 장면으로 활용한다. 동백의 강인한 심지에 반해 그를 존중하며 따르던 용식이, 더는 동백의 심지를 믿지 못하고 그의 의사를 묻지 않고 개입하는 걸 ‘섹시’하다고 서술하는 이 아이러니.

더 심각한 건, 여성의 의사를 묻지 않고 멋대로 개입하는 남성상을 긍정하는 역을 여성 캐릭터, 그것도 예비 장모에게 맡긴다는 점이다. 용식이 동백을 데리러 떠난 자리를 정리하며, 정숙은 제법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혼잣말한다. “모지리가 그래도 사람 구실은 하려는 모양”이라고. 인습이 사람에게 가하는 폭력을 비판하면서도 인습 때문에 그런 거니 사과를 안 받아도 먼저 용서하고, 여자 주인공의 강인한 심지에 반한 남자 주인공이 더는 여자 주인공의 심지를 안 믿는 상황을 ‘섹시’하다고 서술하는 <동백꽃 필 무렵>의 ‘휴머니즘’은 어딘가 기만적이다. 그래서 모두가 <동백꽃 필 무렵>에 찬사를 보내는 이 시점에, 더 늦기 전에 이야기해야겠다. 이 드라마는 위험한 드라마다.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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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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