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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1.28 19:22 수정 : 2009.05.28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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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편집인의 눈/

동서냉전 때 미국으로 초청된 러시아 언론인들이 마지막 날 소감을 묻는 주최 쪽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수많은 신문과 방송이 있는데도 주요 현안에 대한 논조가 똑같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언론인들을 수용소로 보내야 가능한 일인데 당신네 비결은 뭐냐?”

우스개처럼 들리는 이 일화는 국가보다 자본에 의한 언론 통제가 훨씬 더 획일적이고 효과적이라는 점을 풍자한다. 시장에 맡겨진 미국 언론은 6개 미디어그룹이 90% 이상을 장악할 정도로 정보와 여론의 독과점 현상이 심하다. 소수자, 특히 진보적 지식인의 목소리는 주요 매체에서 거의 배제돼, 이라크전만 하더라도 ‘권위지’라는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조차 개전 분위기에 동조했다. 잘못된 전쟁과 무분별한 금융규제 완화의 대가는 이제 미국인뿐 아니라 전세계인의 고통으로 남겨졌다.

참으로 기이한 것은, 그런 미국이 우리나라에서는 언론법안들을 둘러싼 논란에서도 하나의 표준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미국은 형식만 갖춘 공익방송이 있을 뿐 언론 시스템 전반에 문제가 많은 나라다. 신문·방송 겸영도 이명박 정부와 보수신문이 말하듯 ‘세계적 추세’가 아닐뿐더러, 설령 세계적 추세일지라도 논점의 핵심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 추세가 옳으냐 그르냐를 따져보고 미디어 정책의 방향을 결정해야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이 신방 겸영을 허용하니 우리도 그렇게 하자”는 주장은 비합리적이다. 이탈리아 역시 언론을 시장에 맡기고 방송의 경우 미국의 상업방송 모델을 뒤따른 나라지만, 진정한 민주주의가 요원해졌다는 평가를 듣는다. 이탈리아 언론을 장악한 재벌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집권 뒤 ‘코드 인사’를 통해 국영방송마저 장악해 버렸다.

이탈리아 국영텔레비전은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유엔총회에서 연설할 때 텅 빈 청중석 대신 코피 아난 사무총장 연설 때 꽉 찬 청중석 장면을 편집해 넣었다. <한국방송>(KBS)이 보신각 타종 때 시위하는 청중 대신 박수소리를 편집해 넣은 것과 너무나 흡사하다.

신방겸영과 재벌방송이 훼손할 ‘민주주의적 가치’ 집중조명을
영국 <가디언> 미디어 섹션은 ‘진보이념’과 ‘재미’로 독자 확보
미디어팀·지면 강화해 한국사회 담론 소생시켰으면


프랑스 또한 니콜라 사르코지 집권 이후 5개 공영방송을 하나로 통폐합하고 사장을 대통령이 임명하게 하는 등 합법적인 언론장악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자신의 집권에 기여한 민영방송과 재벌에는 각종 혜택을 주는 정책도 추진하고 있다. 진보신문인 <리베라시옹>은 1면 머리로 ‘프랑스 사르코비지옹’(France Sarkovision, 2008년 6월26일치), 곧 ‘프랑스 사르코지방송’이라는 제목을 달고 프랑스 민주주의의 장래를 걱정하는 기사를 실었다.

언론법안들을 둘러싼 <한겨레>의 ‘이슈 싸움’은 여러 측면에서 상당한 아쉬움을 남겼다. 가령 ‘신방 겸영이 세계적 추세’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신방 겸영과 재벌의 방송 진출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집중 조명하는 기획기사들이 매우 모자랐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우리 사회 3대 파워그룹인 일부 언론권력과 경제권력이 정치권력과 결탁해 촉발한 언론법안 논쟁은 헤게모니 싸움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다. 헤게모니의 어원인 ‘헤게모니아’(Hegemonia)는 그리스 수사학에서 ‘말과 언어가 모든 것들의 주도자’라는 뜻으로 쓰였다고 한다. 말을 장악하면 물리적 폭력이나 강제력 없이도 자발적 동의를 끌어낼 수 있다. 서민들이 종종 부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권을 탄생시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독일·프랑스·스페인에서는 아직도 고급 정론지를 중심으로 토론문화가 유지되고 있지만, 미국과 이탈리아에서는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경로가 막혀 민중의식의 빈곤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2003년의 발언인데, ‘사르코지방송’이 가시화하고 <르몽드>와 <리베라시옹>이 자본의 품에 안긴 현시점에서는 프랑스도 미국과 이탈리아의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언론법들이 원안대로 통과되고 방송 민영화가 이뤄진다면 한국도 그들 나라 반열에 낄 듯하다.

언론법안 추진 세력은 미디어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고용을 창출한다고 하는데, 그 근거의 허술함을 언급할 지면은 없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들 주장이 설령 옳다 치더라도 미디어의 공공성과 여론의 다양성, 그리고 민주주의적 가치를 훼손할 만큼 높은 타당성을 지녔느냐 하는 점이다. 또 민영화의 불가역성에 주목한다면 절대로 서두를 일이 아니다. 방송을 한번 재벌에 넘기면 전두환 같은 이가 다시 등장하지 않는 한 빼앗을 수도 없다.

이봉수 시민편집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한겨레가 이런 논란의 중심에서 스스로 위상을 높이고 나아가 민주주의적 가치를 수호하려면, 미디어팀과 미디어면을 대폭 강화할 필요가 있다. 유럽의 진보신문들은 미디어팀을 최강으로 구성하고 매주 두툼하게 미디어 섹션을 발행하는 데가 많다. 미디어면이야말로 보수언론의 논조를 비판하면서 자연스레 토론을 유도하고 진보이념을 전파하는 ‘진지’로 생각하는 듯하다. 딱딱한 기사만 쓰는 게 아니라 현대인의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는 미디어의 이모저모를 재미있게 엮어낸다.

<가디언>은 매주 월요일에 30쪽 안팎의 ‘미디어 가디언’을 여러 섹션과 함께 낸다. 물론 절반 정도는 광고로 채우지만 종합면에도 수시로 기사가 나가는 점을 고려하면 엄청난 기사량이다. 우리나라는 섹션면이 광고단가가 싸지만 ‘미디어 가디언’은 워낙 정평이 나 있어서 미디어기기와 구인광고 등 미디어 관련 광고가 집중된다.

미디어 부문은 전문기자의 영역인데도 한겨레는 아직 그렇게 운용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미디어 담당 기자들의 ‘고군분투’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전문성 부족에서 비롯되는 몇몇 과오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진보언론의 맏형에 걸맞을 만큼 미디어 관련 의제들을 앞장서서 끌고 나간다는 인상을 주지 못하고, 기사 방향이나 외국 언론에 관한 내용이 옳지 않은 경우도 눈에 띈다.

<경향신문> 미디어팀은 청와대 비서실장, 방송통신위원장, 케이비에스 사장 후보 등의 비밀회동을 특종보도한 데 이어 언론법 관련 이슈들을 힘있게 끌고 나가는 집중력이 돋보였다. 방통위가 신문·방송 겸영 허용을 공식화한 날을 예로 든다면, 보수신문들은 1면 머릿기사로 다루면서 1~2개 면을 할애해 해설까지 붙인 반면, 한겨레는 해설 없이 1면 네번째 발표기사로만 처리했다.(9월5일치)

이날 진보 쪽 대항마는 누가 봐도 여러 면에 걸쳐 집중기획 등을 내보낸 경향이었다. 다음날 사설에서도 각 신문들은 찬반양론을 폈으나 한겨레는 침묵했다. 한겨레는 닷새 뒤 미디어면에서 그 이슈를 다뤘으나, 같은날 경향은 미디어면에서 다른 진전상황들을 다뤘다.

이제 언론법안 추진세력은 2월 국회 격돌을 앞두고 치열한 홍보전에 들어갔다. 한겨레는 자신의 사활까지 걸린 이 국면에서 무얼 기획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봉수 시민편집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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