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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4.29 21:51 수정 : 2009.05.28 17:21

배신감과 ‘진영 논리’ 배어나는 ‘노무현 보도’, 그림 김영훈 기자kimyh@hani.co.kr

시민편집인의 눈 /

감정 실린 표현 많고, 검찰 입 의존 의혹 부풀리기도
피하고 싶은 글감인가, 한 달 칼럼·사설 각각 5건뿐
노 정권 가치 싸잡아 매도하는 보수 프레임엔 맞서야

‘배신자’란 말만큼 자의적으로 쓰이는 말도 드물 것이다. 자기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기준으로 타인을 ‘배신자’ 또는 ‘의리파’로 규정한다. 사랑을 할 때도 자신을 떠나가면 ‘배신자’요, 상대방이 남을 배신하고 자신에게 돌아오면 ‘순정파’다. 그런데 그 많은 배신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실은 우리 안에 배신의 심리가 숨어 있고 우리 자신도 배신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이 스스로 배신당했다는 생각을 자주 하지만 자신이 남을 배신했다고 인정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한다.

특히 정치인들은 그런 성향이 강한 걸까? 조직을 배신하고 집단 탈당을 하면서도 그냥 주저앉는 이탈자가 생기면 그 사람을 배신자로 낙인찍는다. 정몽준 의원은 27일 노무현 전 대통령을 “배신과 기만의 정치로 표를 얻은 정치꾼”이라고 몰아붙였다. 대선 하루 전 노무현 후보 지지를 철회했던 그도 자신을 배신자로 여기지는 않나 보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배신감을 강조하는 기사들이 신문과 방송을 뒤덮고 있다. 그러나 보수언론은 엄밀하게 말해서 배신을 당한 적이 없다. 배신은 ‘믿음을 저버렸다’는 뜻인데, 보수언론이 ‘노무현’에게 신뢰를 보낸 적이 있었던가? 정치적 지향의 옳고 그름을 떠나 노 대통령이 우파에게 손을 내민 ‘대연정’조차 일축했다.

진보 쪽의 배신감과 황망함은 보기에도 민망하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느낌”(9일 4면에 보도된 민주당 반응)이라느니, “‘혼자 깨끗한 척하더니’라는 비아냥에도 할 말이 없게 됐다”(13일치 22면, ‘편집국에서’)느니 하는 표현에 그런 심중이 드러난다. 그러면서 의견 표명을 단념하거나, 글을 쓰더라도 ‘감정’이 실린 용어와 표현이 등장한다. 애증과 배신감의 발로다.


그러나 시민편집인실에 걸려오는 전화 중에는 그런 배신감을 토로하면서도, “<한겨레>가 중심을 잡아야 한다”며 항의하는 독자가 적지 않다. 한 아주머니는 “돈을 받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다른 대통령에 비해 그래도 깨끗한 사람 아니냐”며 “그런 점을 고려해 균형감 있게 보도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시점에서 균형감이란 무엇일까? 우선 진실을 파헤치면서도 근거 없이 의혹을 부풀리거나 싸잡아 매도하지 않는 보도 태도일 것이다. 그런 잣대에 거슬리는 보도들이 꽤 있었다.

8일치 3면 기사(7판), ‘형님 이어 부인까지…노무현 전 대통령 도덕성 치명타’를 예로 들어 보자. “참여정부의 기반이 와르르 무너졌다”거나 “참여정부의 비리는 구멍 난 모래주머니처럼 줄줄 새어 나왔다”는 내용은 좀더 객관적인 표현으로도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었으리라. 중간쯤 나오는 문장에서 “지난 대선 때는 보수 진영에서조차 “무능보다 부패가 낫다”며 “노 정권이 무능하기는 했지만 부패하지는 않았다”고 인정할 정도였다”고 표현한 것도 부적절했다. 보수 언론의 프레임을 차용한 탓에 독자들은 ‘참여정부가 무능하면서도 부패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9일치 3면 ‘노건호·연철호씨-박연차 회동 의혹 증폭’ 기사에서 “이 돈(500만달러)이 투자자금을 가장해 노 전 대통령 쪽에 건너간 비자금이 아니냐는 의혹이 커지고 있다”고 했으나, 그것을 뒷받침할 ‘팩트’는 없다.

16일치 6면 ‘박연차 ‘입’ 넘어 ‘대가성 증명’ 고심’ 기사는 제목이 검찰의 노고를 치하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도 있다. 이 기사에서 “검찰은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과 노 전 대통령이 여러 경로로 박 회장을 도와줬다는 정황을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으나 역시 추측성 기사에 머물고 있다.

두 개의 추측성 기사가 모두 맞다면 노 전 대통령은 대가성 뇌물을 받았기에 빠져나갈 구멍도 없고 상황 종료다. 그러나 검찰의 입과 추측에 근거해 기사를 쓰다 보니 사건이 뒤로 가는 일도 벌어진다. ‘권양숙씨에 3억 안 갔다’(20일치 1면)는 기사가 그것이다. <한겨레>만의 문제가 아니고 법조 취재팀의 노고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보수신문과 함께 이런 식의 속보경쟁을 벌일 필요가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검찰의 입에 의존해 의혹을 부풀리거나 혐의를 기정사실화 하는 듯한 표현을 쓰는 것도 그들의 의도에 말려드는 것이다. 한 독자는 지난 21일 전화를 걸어 “<한겨레>가 검찰의 정치적 의도를 적극적으로 파헤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불만을 표했다.

‘박연차 사건’과 관련한 <한겨레>의 어정쩡한 위치 설정은 독자들로 하여금 <한겨레>가 피아를 구분해서 공격과 방어를 하는 진영논리에서 일정 부분 비롯되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신문의 의견이 드러나는 여론면의 칼럼과 사설의 수에서도 그런 징후가 엿보인다. 4월 들어 29일까지 이 사건과 관련해 두 여론면에 실린 칼럼과 사설의 수는 각각 5건에 불과하다. 우리말과 관련한 왼쪽 아래 칼럼을 빼고 하루에 8건의 칼럼과 사설이 실리니까 대략 200건 가운데 10건만이 관련 의제 활동에 나선 셈이다. 보수언론이 10년 가뭄에 물 만난 듯이 노 정권의 공과를 싸잡아 씻어내 버리려는 태세인 데 견주어 너무 나약해 보인다.

이런 때일수록 명확하게 선을 긋는 위치 설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지난 정권의 비리에 대한 진실 규명을 촉구하는 한편으로 수사 자체에 정치적 목적이 끼어들지 않았는지도 따져볼 일이다. 수사가 부진한 여권 실세들에 대한 탐사보도에도 좀더 힘을 쏟아야 한다. 맞불을 놓아 사건을 무마하라는 게 아니라 총체적으로 진실을 규명하자는 것이다. 나아가 노 정권이 추구한 가치와 정책이 모조리 매도당해 쓰레기장으로 향하는 사태는 막아야 한다. ‘노무현을 버리자’는 보수신문의 의제가 무엇까지 버리자는 얘기인지 안다면 대항의제를 내세워야 한다.

영국의 <가디언>은 노동당이 집권하기 전에는 우군이었지만, 집권하자마자 가장 신랄한 감시자가 됐다. 최근에는 데이비드 캐머런이 이끄는 ‘젊은 보수당’이 전통적인 감세정책을 포기하고 의료복지체계를 확충하겠다고 나서자 우호적인 논조를 펴고 있다. 진영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그 신문이 추구하는 가치를 기준으로 보도 태도를 결정한다.

<한겨레>는 어떤가? 과거 10여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대선 국면에서, 그리고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집권 후 우경화 정책을 펼 때, 권력형 뇌물 비리가 불거질 때, <한겨레>가 진영논리에 빠지지나 않았는지 엄중하게 뒤돌아볼 일이다. 진영논리에 빠졌다면 <한겨레>도 오늘의 사태에 일정 부분 배임의 책임이 있다.

진보 쪽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배신감에서 빚어지는 황망함을 하루빨리 떨쳐버려야 한다. 사실 진보에 대한 노 전 대통령의 배신은 갑작스런 게 아니다. ‘대연정’도 배신이었고, ‘이라크 파병’도 배신이었다. ‘비정규직 양산’은 적어도 배임이었다. 엑스(X)파일 사건 때 ‘삼성 권력’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기회를 놓치고 오히려 대자본의 품에 안겨버린 것은 최대의 배신이었다.


이봉수 시민편집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집권 초기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에게 권력을 나눠주면서 <중앙>을 매개로 대자본에도 줄을 대는 듯했으나 그것이 얼마나 순진한 발상이었는지, 최근 이 신문의 논조를 보면 느끼는 게 있으리라. “어느 정권보다 깨끗했다더니…‘폐족’ 위기 몰린 친노” <중앙> 4월8일치 5면 통단 제목이다. 박연차-강금원 사건은 대자본에 품었던 연정이 성사되지 못하고, 소자본과 안심하고 맺은 유착관계가 세상에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배신감은 애증의 기복을 겪으면서 증폭된다. 애증의 연장선상에서 신문을 만들 일은 아니다, 보수신문도 <한겨레>도.

이봉수 시민편집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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