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편집인의눈] 세습은 왜 모두의 손해로 귀결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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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세습 논란 중심에서 피지배층 이해 대변해야
재벌·교회·정치권력 등 남한 세습문제 의제확장을
세계 역사에서도 현명한 세습군주가 3대 이상 잇따라 나온 왕조는 드물었다. 중국 한나라 문경지치(文景之治)도, 조선 영·정조 시대도 2대로 끝났다. 다만 두드러진 예외가 있었으니,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이 인류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라고 찬양한 5현제 시대가 그것이다. 현명한 황제가 다섯이나 잇따라 나온 배경은 무엇일까?
가장 큰 요인은 그들에게 아들이 없었다는 점이다. 황제들은 경쟁을 거친 지도자나 덕망 높은 철학자를 양자로 삼아 제위를 넘겼다. 그래서 <명상록>을 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같은 철인 황제가 탄생할 수 있었다. 5현제 시대가 마르쿠스로 끝나게 된 것은 그에게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번에 따르면 아들 콤모두스는 로마 황제 중 학문을 멀리한 첫 황제였다. 결국 콤모두스는 폭군 노릇을 하다가 암살됐고, 그때부터 로마제국도 쇠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권력자와 혁명가, 재벌 총수와 대형교회 목사에 이르기까지, 자칫 잘못하면 평생 쌓아 올린 업적과 명성을 단기간에 날려버리는 계기가 되는 게 후계자 승계이다. 냉철했던 판단력도 자식 문제에 이르면 곧잘 마비된다. 오죽하면 철인 황제 마르쿠스마저 방탕한 아들 콤모두스를 후계자로 지명했을까?
한 가정의 대 잇기가 아닌 재벌이나 대형교회의 세습은 그곳에 몸담고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 구성원 전체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사회정의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국가권력의 세습은 말할 것도 없다.
북한의 3대 세습을 둘러싸고 계속되는 논쟁은 비판의 화살이 점차 세습의 주체인 북한 권력층을 벗어나 남한 정치세력을 향하면서 정치세력간 헤게모니 싸움 성격이 짙어지고 있다. 또 남한 사회에 만연한 세습 문제로 논의가 확장되지 않아 이슈화할 기회를 잃어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한겨레>는 창간 이래 북한 또는 통일 문제에 관한 한 국민의 냉전적 사고를 누그러뜨리고 시야를 넓히는 데 선도적 구실을 해왔다. 창간 직후 방북취재 기획과 관련한 리영희 논설고문 구속사건이 상징하듯 때로는 공안당국과 마찰을 빚으면서도 분명한 진보적 시각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김정은이 후계자로 등장하는 과정의 취재경쟁에서는 앞서지 못한 느낌이 든다.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정보당국과 선이 끊어진 탓인지도 모르겠다.
김정은의 3대 세습이 전격 발표되기 불과 2주 전인 9월15일치 칼럼(‘천안함, 남북관계, 6자회담’)에서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3남 김정은이 갑자기 새 지도자로 등장할 가능성은 적다’고 전망했다. 물론 김정은의 전격 부상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나마 보수언론이, 오보를 내기도 했지만, 오래전부터 김정은에 대한 보도경쟁을 해왔다.
북한 당국 발표 뒤 민주노동당의 ‘무비판’과 관련해서는 <경향신문>이 논쟁의 중심에 섰다. <경향>은 사설에서 ‘북한을 무조건 감싸주어야 한다는 생각이라면 그것이야말로 냉전적 사고의 잔재’라고 비판한 뒤, 민노당 쪽이 반박에 나서자 재반박을 하는 등 논전을 끌고 나갔고, 진보논객들의 발언을 일일이 중계했다. <경향> 디지털뉴스팀은 심지어 <한겨레>에 실린 ‘홍세화 칼럼’까지 전문을 다시 소개했다.
<경향>의 이런 태도는 ‘이념적 커밍아웃’을 강요하는 ‘진보판 색깔론’으로 비판받을 여지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견해에 발언권을 인정하는 ‘언론의 공론장 기능’은 착실히 수행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북한을 바라보는 남한 진보세력의 다양한 시각, 곧 엔엘(NL)-피디(PD) 논쟁이 3대 세습을 둘러싸고 진전된 형국이다. <한겨레> 독자들은 ‘미디어전망대’(13일치)에서 논쟁의 내용을 조금 접할 수 있었을 뿐이다. 북한 정권과 직접 대화를 원하는 민노당이 세습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비판을 유보한 것은 한 정당의 전략으로 존중될 수도 있다. 그러나 민노당도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는 정당이라는 점에서 정치적 이해득실은 스스로 떠안아야 할 몫이다. 보수언론은 그것을 빌미로 ‘좌파의 침묵’을 싸잡아 비난하고 있다. 사실 진보진영에서 치열하게 논전을 벌이고 있는 데서 보듯, 좌파는 침묵하고 있는 게 아니다. 보수언론이 민노당을 비난하려면 침묵을 지키고 있는 우리 정부와 미국도 비판해야 공정하다. 북한의 세습과 관련해 <한겨레>가 취할 보도태도는 지배층이 아니라 피지배층의 관점에서 그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본다. 세습으로 집권한 사람은 경제를 파탄으로 몬 선대의 정책 틀을 과감하게 벗어던질 수 없다. 세습체제는 기득권을 영구적으로 고스란히 인정하는 체제이니, 기득권의 양보를 수반하는 통일도 요원해질 것이다. 중국에서 장쩌민, 후진타오에 이어 시진핑으로 권력 승계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분석한 기사(20일치 4면)는 북한의 3대 세습과 비교돼 더욱 눈길을 끈다. 중국도 일당독재 체제지만 지도부 안에서 제한적이나마 노선경쟁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인민민주주의의 또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베트남도 그렇지만 잘나가는 사회주의 국가는 권력 승계 방식이 북한과 판이함을 알 수 있다. <한겨레>가 이번 기회에 남한 사회의 세습 문제 전반으로 의제를 확장해보는 건 어떨까? 특히 재벌의 탈법 상속과 경영권 승계는 하나의 관행처럼 굳어진 상태이다. 불과 몇백억원의 상속세 또는 증여세를 물고 2세, 3세 승계가 이루어진 삼성그룹은 요즘 유행어가 되다시피 한 ‘정의’와 ‘공정한 사회’ 담론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다. 지금 수사를 받고 있는 태광산업이 1997년에 1060억원의 상속세를 냈으니 세금만 보면 삼성그룹보다 훨씬 큰 기업이다. 사실 재산권 상속은 세금만 제대로 낸다면 탓할 일이 아니다. 또 가업을 승계하는 수준이라면 경영권 승계도 나쁘게 볼 이유가 없다. 2세, 3세도 능력이 있으면 경영권을 물려받을 수 있다. ‘소신투자’와 ‘책임경영’ 등 장점도 많아 실제로 좋은 경영성과를 내는 재벌도 있다. 문제는 이미 한 국가 또는 사회의 자산이 되다시피 한 거대그룹의 경영권을 대대손손 고스란히 승계하기 위해 온갖 탈법·편법을 자행한다는 점이다.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이 전 그룹의 경영권까지 장악하면 경영권뿐 아니라 재산까지 잃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막대한 사회적 비용 지출로 귀결될 수 있다. 마이클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화두를 던졌는데, 양극화한 남한 사회에서 가장 큰 정의는 ‘상속세를 제대로 내는 것’이라고 답하고 싶다. 교회 재산도 기본적으로 헌금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세금 한푼 안 내고 2세, 3세가 재산은 물론이고 목사직까지 세습하는 것은 마음을 비워야 하는 종교의 본성과도 어긋난다. 목사 집에 목사 나고, 외교관 집에 외교관 나고, 정치인 집에 정치인 나기 쉬운 사회는 공정한 사회가 아니다.
이봉수 시민편집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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