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3.27 19:35
수정 : 2012.04.04 14:33
MB정권보다도 더 후퇴할 위기 처한 경제민주화
위장된 복지 공약과 이미지의 정치를 벗겨내야
이봉수 시민편집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정신병원에 들어온 걸 환영합니다.” 영화 <철의 여인>에서 초선의원이 된 마거릿 대처가 처음 등원하자 선배 의원이 던진 말이다. ‘정신병원’ 소리를 들을망정 영국 의회에서 우리 정치인이 배워야 할 것은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선 보수·진보 양당 정치의 전통이 뿌리내린 덕분에 선거 때마다 이합집산하고 당명을 바꾸고 실현 불가능한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 거짓말을 했다가는 정치인의 정직성을 엄하게 추궁하는 언론보도로 가차없이 정계에서 추방된다.
유권자는 정치인의 공약을 믿고 투표를 하는데 사실상 실천 불가능한 공약을 내놓는 것은 ‘사기’에 가깝다. 경제 메시아 대망론에 편승한 ‘747 공약’은 사기성이 농후했다. 경제부 기자를 포함한 ‘이코노미스트’는 상당수가 ‘747 공약’의 실천이 어려울 줄 알았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을 통해 ‘잃어버린 10년’에서 벗어나려던 보수언론의 담론활동과 진보언론의 소극적 대응으로 ‘국민사기극’이 성사되고 말았다.
실은 나도 대통령선거 며칠 전 한국방송(KBS) 라디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 출연해 미디어 선거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좀더 과감하게 말하지 못한 게 후회된다. “747 공약이 가능하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사기’라고 말하려다가 ‘환상’이라는 방송용 표현으로 순화하고 만 것이다.
이번 총선의 공약과 공천자 면면들, 그리고 언론의 보도태도를 살펴보면 국회 개원 뒤에 유권자들은 또 속았다고 한탄할 게 분명하다. 언론은 무엇보다 공약의 실천 가능성과 그 공약이 누구를 대변할지 따져야 하는데, 1·2등 후보 위주의 여론조사 결과나 그들의 시장 방문 등 동정을 보도하는 데 집중한다. 그러니 유력 정치인들은 정책보다 홍보에 인력과 돈을 집중하고 캠프마다 전·현직 언론인이 득시글거린다.
한나 아렌트의 말대로 정치의 절반은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사람들이 그 이미지를 믿게 만드는 것이라면 우리 언론은 그런 정치의 충직한 동반자들이다. 특정 정당이 다수당이 됐을 때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실상을 구체적으로 그려내지 못하니 대중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줄 정당 대신 기득권 정당에 투표하는 ‘계급 배신’을 하게 된다.
<한겨레>가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와 함께 ‘눈높이 정책검증’(19, 23일)을 시도한 것은 유권자 편에서 공약을 분석했다는 점에서 참신했다. 몇몇 사설과 칼럼, ‘총선 이슈 분석’(27일) 등을 통해서도 나름대로 의제활동을 해왔다. 그러나 분량이 충분치 못했고, 여당의 재집권 논리를 부수는 데 힘이 부친다는 느낌이다.
여당과 보수언론이 띄운 문재인-손수조 대결구도와 ‘젊은 피’ 프레임에도 <한겨레>가 과도하게 관심을 보일 필요가 있었을까? <한겨레>는 5일 어느 신문보다 빨리 긴급여론조사를 실시해 부산 사상구를 ‘빅매치 지역’에 넣었고, 14일에도 6면 머리로 “손수조, 젊은이들 희망 줄 것”이라는 기사와 문재인 후보 관련 기사를 대비시켰다.
또 여당의 ‘엠비(MB) 차별화’ 전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이명박 정권보다 더 퇴행적인 수구정권이 탄생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못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 그중에서는 그래도 ‘이명박 후보가 가장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대목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지난번 칼럼에서 재벌개혁과 관련해 주로 민주통합당을 비판했으니 이번에는 여당이 재집권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해보자. 새누리당은 ‘국민과의 약속’에서 ‘복지, 일자리, 경제민주화’를 천명하고, 전국에 내건 현수막에도 그것을 부각시켰다. 결론부터 말하면 새누리당이 ‘약속’을 모두 실천할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부문별로는 이명박 정권보다도 더 후퇴할 조짐들이 많다.
우선 경제민주화는 한참 뒷걸음칠 가능성이 높다.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을 둘러싼 경제학자들은 대개 재벌개혁과 거리가 먼 시장만능주의자들이다. 나성린·유승민·유일호 의원 등이 지역구 공천을 받은데다 안종범·이만우·김현숙 교수 등이 대거 가세했다. ‘줄푸세’, 곧 ‘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우자’고 줄기차게 주장하던 이들이 갑자기 부자증세, 재벌규제, 공안통치 완화로 돌아선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박 위원장 자신이 재벌개혁에 전혀 뜻이 없어 보인다. 재벌의 폐해를 줄이자는 사람들을 “대기업 해체를 외치는 세력”으로 싸잡아 매도했다.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은 직후만 해도 ‘재벌은 바뀌어야 한다’더니 상황이 조금 호전되자마자 말을 바꾸는 판국에, 집권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는가.
부자증세 의지가 없다는 사실은 지난해 말 박 위원장의 반대 발언 한마디에 버핏세가 무산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부자증세가 없다면 결국 복지도 어려워진다. 오히려 복지 재원을 마련한다는 명분으로 이익이 많이 나는 인천공항이나 케이티엑스(KTX) 등을 거대자본에 넘겨줄 가능성도 있다.
일자리 창출 역시 고용이 줄어드는 재벌경제체제에 의존한다면 이명박 정권의 전철을 답습할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 대통령 이래 토건을 중시하는 발전모델도 이어받을 것 같다. 박 위원장은 이명박 정권조차 타당성이 없다고 포기한 동남권 신공항도 재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박 위원장은 한나라당 대권주자 시절 “대처 총리처럼 대한민국병을 고치고, 귀족노조의 불법파업이나 시위에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말했다. 대처의 치명적 결함은 사회적 약자를 비롯한 반대자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데 있었다. 박 위원장 또한 상대방 의견을 “토 달지 말라”는 한마디로 일축한다.
차이도 있다. 대처는 식품가게 주인 딸로 태어났지만, 박 위원장은 대통령 딸이었다. 외국을 오갈 때는 정치인들이 공항 귀빈실을 가득 메운다. “나오지 말라”는 한마디면 없어질 구태인데 오히려 즐기는 듯하다. 소위 ‘민주화 시대’의 ‘권위주의적 대통령’. 어쩌면 그런 대통령 탄생의 징검다리가 될지도 모르는 총선이다. 진보언론의 책임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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