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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4.12 18:30 수정 : 2018.04.12 19:14

여현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환자가 스스로 칼을 드는 ‘자가수술’이 전혀 없지는 않다. 극단적인 상황에선 생존을 위해 감행된다. 오나라의 맹장 유찬은 젊은 시절 상처로 다리가 굽은 상태로 굳어 걸을 수 없게 되자 스스로 칼을 대 결국 걷게 됐다고 한다. 협곡의 암석에 몸이 끼어 고립된 산악인이 무딘 칼로 자신의 오른팔을 끊고 탈출한 2003년의 실화는 영화 <127시간>으로 소개됐다. 남극기지의 의사가 자신의 맹장 수술을 했다는 일화도 있다.

자가수술은 위험하다. 수술하다 죽든, 그냥 죽든 마찬가지인 급박한 상황이 아니라면 할 일이 아니다.

그런 위험한 일을 법원이 하고 있다. 11일 대법원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이 발표한 중간 조사결과대로라면, 법원의 병세는 심각하다. 법원행정처 컴퓨터에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확인해주는 파일 406개가 발견됐다. 의혹 하나하나가 중차대하다. 판사회의 선거나 법관 모임에 영향을 미치려 한 문건은 법관 사찰과 공작의 증거다.

2013년 12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통상임금 판결에 ‘청와대가 흡족해한다’는 문건은 정치권력과의 거래를 드러낸다. 그해 5월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통상임금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제너럴모터스(GM) 회장의 부탁에 “꼭 풀어나가겠다”고 답했다. ‘풀겠다’는 약속과 ‘흡족’의 결과 사이에, ‘정기상여금 등은 통상임금이지만, 이를 이유로 한 추가임금 청구는 신의칙상 안 된다’는 기묘한 판결이 있다. 정황대로라면, 법원의 독립과 신뢰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사건의 재판 동향 등을 행정처가 청와대에 알려준 모습도 확인됐다. 공교롭게 대법원은 항소심의 원 전 원장 유죄 판결을 파기 환송했다. ‘재판 뒷거래’가 의심되는 이런 정황만으로도 “공정성의 외관, 국민의 신뢰는 깨어져 버렸다.” 고작 한두 사건이라고 할 일은 아니다. 몸속의 장기 한두 군데가 막혀 썩고 있는 모습을 이제야 확인한 중대 사태다.

수술은 미룰 수 없다. 다른 치료를 앞세울 일도 아니다. 근원적 문제의 해결 없는 온전한 개혁은 없다.

법원의 힘만으로 가능한지는 의문이다. 진단과 처방까지는 몰라도, 환부를 도려내는 수술은 스스로 다 하기 어렵다. 앞으로 강제조사도 필요할 것이고, 범죄 혐의에 대한 대법원장의 형사소송법상 고발 의무도 외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환부를 드러내고 책임을 따져 대책을 강구하는 과정이 법원 사람들만의 공간에서 진행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리하면 내부인들끼리 적당히 봉합한다는 의심을 받게 된다. 국민 신뢰의 온전한 회복도 어렵다. 공정성의 외관이 깨진 게 이번 사태라면, 그 해결에선 투명성과 공정성의 외관부터 확보돼야 한다.

지금의 의혹은 법원 내부로부터의 독립만이 아니라 외부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 위협받은 사건이다. 이런 일이 다시 없으려면 정치권력에 ‘아쉬운 일’부터 없어야 한다. 인사와 예산이 대표적이다. 대법원장 지명과 대법관 임명에 관한 대통령의 독점적 권한은 정부 개헌안에서도 그대로다. 대통령의 힘을 의식해야 한다면 언제든 지금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 독자적 예산편성권도 긴요하다. 지갑을 쥐면 지갑의 내용물에 의존하는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한다. “사법부가 적절한 예산을 확보하지 못하면 기능의 효율적 수행이 어려운 것은 물론 외부 압력과 부패에 취약해진다”(‘법률가를 위한 유엔 국제인권법 매뉴얼’)는 지적도 있는 터다.

법원에 지금 필요한 것은 중대한 수술에 안팎의 힘을 모으는 지혜다.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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