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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4.24 17:16 수정 : 2018.04.25 09:27

고명섭

논설위원

고대 그리스인들이 시간을 두 종류로 나누어 이해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가 그것이다. 크로노스는 객관적·물리적 시간이라고 하고 카이로스는 주관적·심리적 시간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이 두 시간을 흐르는 방향의 차이로 설명할 수도 있다. 크로노스는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시간이다. 반대로 카이로스는 미래에서 현재로 거슬러 흐르는 시간이다. 미래의 어떤 특정한 시점에 서서 현재를 돌아보는 것이 카이로스다. 카이로스는 때가 오기를,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우리의 기원과 소망이 투사된 미래의 사건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그날이 언제 어떻게 올지 모르기 때문에 이 시간을 사는 사람들은 긴박하고도 간절한 삶을 산다. 재림의 그날을 기다리던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런 삶을 살았다. 바울로의 서신은 바로 이 시간 속에서 쓴 글들이다.

우리에겐 지난 100년의 삶이 카이로스의 삶이었다. 해방의 날이 오기를, 분단의 세월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삶이었다. 그 시간은 끝없이 지체되고 뒤로 미루어지기만 했다. 그런데 이제 때가 무르익은 듯하다. 한반도를 완강히 지배하던 운명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도 있는 대전환의 사건들이 예고돼 있다. 27일 열리는 남북정상회담, 한 달 뒤의 북-미 정상회담, 그리고 다시 남-북-미 정상회담…. 이 시간이야말로 세계사 100년이 응축된 시간이다. 그러니 이 만남들을 1989년 미-소 정상의 몰타회담에 견주는 것은 조금도 과하지 않다. 몰타회담은 동서냉전의 벽을 허물어뜨렸지만 이 회담으로도 허물어지지 않고 남은 마지막 장벽이 한반도를 가르는 휴전선이다. 이 시간을 어떻게 맞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냉전의 벽이 만든 섬에서 해방되느냐 그러지 못하느냐가 결정된다.

카이로스를 의인화한 그리스 조각엔 이 시간의 신이 칼날 위에 저울을 올려놓고 균형을 잡고 있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칼날 위에 선 위태로운 시간, 위기와 기회가 한 끗 차이로 갈리는 시간이다. 카이로스의 신이 칼날 위에 놓인 저울의 평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절묘한 균형 감각 덕이다. 시간의 균형 감각이란 타이밍의 감각이다. 가장 적절한 때를 찾아내 그 때를 잡아채려면, 섬세한 눈과 함께 전체를 보는 눈이 필요하다. 전체를 보는 눈이란 다른 말로 하면, 세계사의 시간을 통찰하는 시야다. 지금껏 우리에겐 이 세계사를 보는 시야가 부족했다. 안에서 싸우느라 전체를 보지 못했다.

칼날 위에 저울을 올려놓고 균형을 잡는 시간의 신 카이로스.
문재인 대통령이 얼마 전 불교계 지도자들을 만나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우리 불교의 소중한 유산인 화쟁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며 “화쟁의 정신이 한반도에 실현돼 갈등과 분열이 해소되도록 기도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 말 그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화쟁의 정신이다. 원효의 가르침을 들여다보면, 화쟁은 중간에 서서 싸움을 말리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화쟁의 정신은 대립하는 양자보다 더 높은 곳에서 더 넓은 안목으로 볼 것을 요구한다. 전체를 통찰하기 때문에 다툼을 화해시킬 수 있는 제3의 길이 보이는 것이다. 남한과 북한 사이에, 북한과 미국 사이에 놓인 그 차이를 조화시키려면 두 당사자보다 더 높이, 더 멀리 보아야 한다. 중재자는 중재자를 넘어서야만 진정한 중재자가 된다. 한반도가 세계사의 족쇄를 풀고 도약하느냐 그러지 못하느냐가 판가름 나는 시간이 다가온다. 이 기회를 놓치면 우리는 또다시 한 세대를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화쟁의 정신으로 이 카이로스의 시간을 건너야 한다. “때가 찼다.”(마르코복음 1장 15절)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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