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그래서 그랬던 모양이다. 그들도 몰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187쪽에 이르는 대법원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 조사보고서를 보면 한탄이 절로 나온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청와대와의 거래에 동원했다는 판결들은 하나같이 <한겨레>가 강하게 비판했던 사건들이다. 통상임금, 과거사 국가배상, 키코, 케이티엑스 승무원, 쌍용차 정리해고, 전교조 법외노조 효력정지 등이 다 그렇다. 상고법원 성사의 ‘밀당’에 동원됐다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이 대표적이다. 항소심이 80여쪽에 걸쳐 이유를 설명하며 증거로 인정한 이메일 첨부문서를 대법원은 뚜렷한 근거도 없이 단 한 문장으로 증거가 아니라고 배척했다. 다른 증거로도 원심처럼 ‘선거법 위반 유죄’로 판단할 수 있는데, 굳이 그 이유만으로 사건을 되돌려보냈다. 그것도 13 대 0이다. 이상하고 어색하다. 대법관들은 몰랐을까. 답은 3년 뒤 나왔다. 2015년 2월 항소심 선고날 행정처가 만든 문건에는 그해 7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문제 삼은 쟁점들이 그대로 들어 있다. ‘전체적으로 판단해 전부 유죄 또는 전부 무죄로 봐야 할 것’이라는 문건에 맞춘 듯 사건은 통째로 파기환송됐다. 문건은 작성 다음날 사건을 맡은 대법원 재판연구관에게 전달됐다. 그렇게 ‘인풋’이 있고, ‘아웃풋’이 같았다면 중간 과정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재판 오염’을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다. 거래가 그때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2015년 11월 행정처 문건은 “국가적·사회적 파급력이 큰 사건이나 민감한 정치적 사건 등에서 BH(청와대)와 사전 교감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물밑에서 예측불허의 돌출 판결이 선고되지 않도록 조율하는 역할을 수행”해왔다고 썼다. 통상임금 판결도 그런 ‘조율’의 결과일 수 있다. 2013년 5월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제너럴모터스(GM) 회장에게 통상임금 문제를 “꼭 풀어나가겠다”고 약속했다. 그해 12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법 해석의 왜곡’이라는 반대를 무릅쓰고 “정기상여금 등도 통상임금이지만, 그동안의 체불임금은 요구할 수 없다”는 기묘한 판결을 했다. 청와대는 “대법원이 정부와 재계의 고민을 잘 헤아리고 십분 고려하여 준 것”이라는 ‘칭찬’을 했다고 행정처 문건은 보고했다. ‘약속’과 ‘칭찬’ 사이에는 어떤 ‘교감’과 ‘조율’이 있었을까. 그런 일은 또 어디 한둘일까. 특별조사단은 ‘재판 오염’을 부인하고 있다. 판사들의 생리상, 그랬을 리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다고 덮을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지금은 사법행정권 남용이라는 표현도 부족한, 국기 문란과 사법부 대참사의 위기라고 한다. 참사는 법원 내부에서 법관 독립을 침해하고 재판 오염을 시도한 데서 비롯됐다. 그 결과가 판결에 대한 의심이다. 누구와 거래하려는 판결이냐 따위 의심이 퍼지기 시작하면 법치는 무너진다. 청와대 거래 목록에 올랐다는 판결의 당사자들은 이미 ‘판결 무효’와 ‘관계자 처벌’을 주장하고 나섰다. ‘신뢰할 만한 외양’을 잃고, 판결을 의심받는 법원이 설 자리는 없다. 이런 사정을 국민이 모를까. 그동안의 법원 자체 조사에선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 이상의 ‘윗선’은 전혀 조사하지 못했다. 손을 보탠 당시 행정처 법관들에게도 면죄부를 주려 한다. 그러고서 ‘재판 오염은 없다’고 한들 납득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법원이 스스로 잘못을 도려내기 어렵다면 법원 바깥에서 치유할 길을 찾는 게 당연하다. 법원은 더 망설이지 말고 혐의자들을 고발해야 한다. yeopo@hani.co.kr
칼럼 |
[아침햇발] ‘재판 오염’을 밝혀야 한다 / 여현호 |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그래서 그랬던 모양이다. 그들도 몰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187쪽에 이르는 대법원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 조사보고서를 보면 한탄이 절로 나온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청와대와의 거래에 동원했다는 판결들은 하나같이 <한겨레>가 강하게 비판했던 사건들이다. 통상임금, 과거사 국가배상, 키코, 케이티엑스 승무원, 쌍용차 정리해고, 전교조 법외노조 효력정지 등이 다 그렇다. 상고법원 성사의 ‘밀당’에 동원됐다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이 대표적이다. 항소심이 80여쪽에 걸쳐 이유를 설명하며 증거로 인정한 이메일 첨부문서를 대법원은 뚜렷한 근거도 없이 단 한 문장으로 증거가 아니라고 배척했다. 다른 증거로도 원심처럼 ‘선거법 위반 유죄’로 판단할 수 있는데, 굳이 그 이유만으로 사건을 되돌려보냈다. 그것도 13 대 0이다. 이상하고 어색하다. 대법관들은 몰랐을까. 답은 3년 뒤 나왔다. 2015년 2월 항소심 선고날 행정처가 만든 문건에는 그해 7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문제 삼은 쟁점들이 그대로 들어 있다. ‘전체적으로 판단해 전부 유죄 또는 전부 무죄로 봐야 할 것’이라는 문건에 맞춘 듯 사건은 통째로 파기환송됐다. 문건은 작성 다음날 사건을 맡은 대법원 재판연구관에게 전달됐다. 그렇게 ‘인풋’이 있고, ‘아웃풋’이 같았다면 중간 과정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재판 오염’을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다. 거래가 그때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2015년 11월 행정처 문건은 “국가적·사회적 파급력이 큰 사건이나 민감한 정치적 사건 등에서 BH(청와대)와 사전 교감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물밑에서 예측불허의 돌출 판결이 선고되지 않도록 조율하는 역할을 수행”해왔다고 썼다. 통상임금 판결도 그런 ‘조율’의 결과일 수 있다. 2013년 5월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제너럴모터스(GM) 회장에게 통상임금 문제를 “꼭 풀어나가겠다”고 약속했다. 그해 12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법 해석의 왜곡’이라는 반대를 무릅쓰고 “정기상여금 등도 통상임금이지만, 그동안의 체불임금은 요구할 수 없다”는 기묘한 판결을 했다. 청와대는 “대법원이 정부와 재계의 고민을 잘 헤아리고 십분 고려하여 준 것”이라는 ‘칭찬’을 했다고 행정처 문건은 보고했다. ‘약속’과 ‘칭찬’ 사이에는 어떤 ‘교감’과 ‘조율’이 있었을까. 그런 일은 또 어디 한둘일까. 특별조사단은 ‘재판 오염’을 부인하고 있다. 판사들의 생리상, 그랬을 리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다고 덮을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지금은 사법행정권 남용이라는 표현도 부족한, 국기 문란과 사법부 대참사의 위기라고 한다. 참사는 법원 내부에서 법관 독립을 침해하고 재판 오염을 시도한 데서 비롯됐다. 그 결과가 판결에 대한 의심이다. 누구와 거래하려는 판결이냐 따위 의심이 퍼지기 시작하면 법치는 무너진다. 청와대 거래 목록에 올랐다는 판결의 당사자들은 이미 ‘판결 무효’와 ‘관계자 처벌’을 주장하고 나섰다. ‘신뢰할 만한 외양’을 잃고, 판결을 의심받는 법원이 설 자리는 없다. 이런 사정을 국민이 모를까. 그동안의 법원 자체 조사에선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 이상의 ‘윗선’은 전혀 조사하지 못했다. 손을 보탠 당시 행정처 법관들에게도 면죄부를 주려 한다. 그러고서 ‘재판 오염은 없다’고 한들 납득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법원이 스스로 잘못을 도려내기 어렵다면 법원 바깥에서 치유할 길을 찾는 게 당연하다. 법원은 더 망설이지 말고 혐의자들을 고발해야 한다.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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