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6.05 18:06
수정 : 2018.06.06 13:53
안재승
논설위원
논쟁은 필요하다. 상호 이해를 돕고 더 나은 대안을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진행되고 있는 ‘최저임금 논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뚜렷한 근거도 없이 서로 내 주장만 옳다며 상대에게 굴복을 요구한다. 정쟁과 다를 게 없다. 이 과정에서 통계의 자의적 해석, 사실 왜곡, 아전인수식 주장이 난무한다. 최저임금 인상의 취지는 실종된 지 오래다.
보수언론과 야당은 최저임금 인상의 경제·사회적 배경에는 눈을 감은 채 정부 공격에만 열을 올린다. 마치 최저임금 인상이 국가경제를 망치는 주범인 양 매도한다.
우리 경제가 오랜 세월 대기업 중심으로 굴러가면서 소득 격차가 커졌다. 성장의 과실이 경제주체들에게 골고루 돌아가지 않고 대기업에만 쏠린 탓이다. 그 결과 ‘부자 기업, 가난한 가계’의 이중구조가 고착됐다. 지난해 임금노동자의 43%가 한달에 200만원도 못 벌었다. 올해 일자리안정자금 지원이 없었다면 한달에 157만원의 최저임금도 못 받는 노동자가 300만명을 넘는다.
더 이상 시장에만 맡겨둬서는 소득 양극화 해소가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에 정부가 직접 나서게 된 것이다. 소득 격차는 분배구조를 악화시킬 뿐 아니라 성장도 가로막는다. 저소득층의 소득 증대는 소비를 촉진하고 일자리를 늘리는 선순환을 가져온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라도 공정한 분배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부작용만 과도하게 부각해 최저임금 인상을 무산시키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기득권 지키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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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 김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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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정부는 의욕만 앞섰지 준비가 부실했다. 갑의 양보 없는 최저임금 인상은 을들의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최저임금 16.4% 인상을 발표하면서 3조원 규모의 일자리안정자금 지원과 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 대기업과 프랜차이즈 본사의 갑질 근절, 재벌 총수 일가의 일감몰아주기 규제 강화 등 여러 보완책을 내놨다. 하지만 일자리안정자금을 빼고는 이뤄진 게 거의 없다. 결국 최저임금 인상 부담을 영세기업과 소상공인들이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 정부가 약속한 경제민주화 조처는 단기간에 실현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또 야당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들이 많다.
‘2020년 최저임금 1만원’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다. 공약은 최대한 이행하는 게 옳다. 하지만 냉정히 따져보면 최저임금 1만원 인상은 정책 목표라기보다는 수단이다. 목표는 저소득층의 소득을 늘려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최저임금 인상과 함께 다른 정책 수단을 병행해 최저임금 1만원 인상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적극 고려해 봄직하다. 또 다른 을들의 반대를 부르는 최저임금 1만원 인상에만 굳이 매달릴 이유가 없다.
대안은 많다. 한 예로 근로장려세제(EITC) 확대를 병행하는 방안을 들 수 있다. 참여정부 때 도입된 근로장려세제는 근로소득을 기준으로 최저생계비에 못 미치는 금액을 정부가 직접 지급하는 제도다. 임금노동자와 자영업자 가구 모두에게 적용된다. 최저임금 1만원 인상과 동일한 효과를 내는 수준까지 근로장려세제의 지원 대상과 금액을 확대한다면 소모적인 갈등을 줄이면서 애초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전문가들 가운데는 최저임금보다 근로장려세제의 효과를 높이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물론 공약 수정에 대해 노동계에 진솔하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절차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누가 이기고 지느냐의 대결 구도로는 문제를 풀기 어렵다. 실사구시의 정신이 필요한 때다.
js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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