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1989년 12월 콜 서독 총리의 드레스덴 방문은 독일 통일의 결정적 장면 중 하나다. 베를린 장벽 붕괴 한달 뒤 콜이 이곳을 찾자 동독 주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환영했다. 동·서독 지도자들은 그때 더 이상 통일을 거스르기 어렵다는 점을 직감했다. 콜의 연설에 동독인들은 차분하면서도 단호하게 지지를 표했고, 세계는 이를 숨죽이며 지켜봤다. 독일 통일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서독의 동방정책이 지속되면서 동독인의 마음을 산 것도 컸다. 동방정책은 1972년 동서독기본조약으로 구체화됐다. 이 조약은 쉽게 말해 더 이상 통일을 추구하지 않고 ‘1민족 2국가’ 체제로 살아간다는 합의였다. 서독 입장에서 통일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건 동독 붕괴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통일을 얘기하면 대결로 갈 수밖에 없는 만큼 통일은 제쳐두고 2국 체제로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이 조약은 서독에서 보수 야당의 반발로 격렬한 논란에 휩싸였지만 결국 의회가 승인하고 대법원도 합헌으로 결정했다.
칼럼 |
[아침햇발] 아직도 ‘북한 붕괴’에 미련이 남았나 / 백기철 |
논설위원 1989년 12월 콜 서독 총리의 드레스덴 방문은 독일 통일의 결정적 장면 중 하나다. 베를린 장벽 붕괴 한달 뒤 콜이 이곳을 찾자 동독 주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환영했다. 동·서독 지도자들은 그때 더 이상 통일을 거스르기 어렵다는 점을 직감했다. 콜의 연설에 동독인들은 차분하면서도 단호하게 지지를 표했고, 세계는 이를 숨죽이며 지켜봤다. 독일 통일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서독의 동방정책이 지속되면서 동독인의 마음을 산 것도 컸다. 동방정책은 1972년 동서독기본조약으로 구체화됐다. 이 조약은 쉽게 말해 더 이상 통일을 추구하지 않고 ‘1민족 2국가’ 체제로 살아간다는 합의였다. 서독 입장에서 통일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건 동독 붕괴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통일을 얘기하면 대결로 갈 수밖에 없는 만큼 통일은 제쳐두고 2국 체제로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이 조약은 서독에서 보수 야당의 반발로 격렬한 논란에 휩싸였지만 결국 의회가 승인하고 대법원도 합헌으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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