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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6.07 17:49 수정 : 2018.06.07 19:07

백기철
논설위원

1989년 12월 콜 서독 총리의 드레스덴 방문은 독일 통일의 결정적 장면 중 하나다. 베를린 장벽 붕괴 한달 뒤 콜이 이곳을 찾자 동독 주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환영했다. 동·서독 지도자들은 그때 더 이상 통일을 거스르기 어렵다는 점을 직감했다. 콜의 연설에 동독인들은 차분하면서도 단호하게 지지를 표했고, 세계는 이를 숨죽이며 지켜봤다.

독일 통일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서독의 동방정책이 지속되면서 동독인의 마음을 산 것도 컸다. 동방정책은 1972년 동서독기본조약으로 구체화됐다. 이 조약은 쉽게 말해 더 이상 통일을 추구하지 않고 ‘1민족 2국가’ 체제로 살아간다는 합의였다.

서독 입장에서 통일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건 동독 붕괴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통일을 얘기하면 대결로 갈 수밖에 없는 만큼 통일은 제쳐두고 2국 체제로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이 조약은 서독에서 보수 야당의 반발로 격렬한 논란에 휩싸였지만 결국 의회가 승인하고 대법원도 합헌으로 결정했다.

한반도 대변화의 초입에서 독일의 길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독일은 상대에 대한 붕괴전략을 접으면서 역설적으로 통일의 길에 들어섰다. 우리도 이제 북한과 어떻게 살아갈지 결단할 때다. 북한 붕괴의 길을 갈지, 아니면 더 이상 통일을 추구하지 않고 ‘1민족 2국가’ 체제로 공존할지 선택해야 한다.

독일이 우리와 다른 건 평화공존 합의가 이후 지켜졌느냐 여부다. 사민당에 이어 1982년 집권한 기민당은 동방정책을 조금 수정했을 뿐 기조는 유지, 발전시켰다. 통일보다 데탕트를 우선시했고, 분단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데 주력했다.

우리는 어떤가. 1992년 채택한 남북기본합의서는 국회 승인 없이 유야무야됐다. 6·15선언, 10·4선언은 정권이 보수로 넘어가면서 없던 일이 됐다. 북한 역시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하는 등 약속 파기를 거듭했다. 남과 북 모두 상대와의 합의를 휴짓조각 취급했다.

새 출발선에 선 남북은 상대에 대한 전략이 무엇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북한은 실현 불가능한 적화노선을 접어야 한다. 남한도 붕괴인지, 공존인지 모두가 결단해야 한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면 제재와 압박이냐, 대화와 타협이냐의 문제는 전쟁이냐 평화냐의 문제로 외화되기도 했지만, 실은 북한 붕괴론과 공존론의 대립이었다. 제재·압박 주장의 기저에는 북한 붕괴론이 있다. 제재·압박 과정에서 북한이 꿇고 대화로 나오든, 반발해 대결로 치닫든 결국 체제 취약성이 드러나 붕괴되리라는 노림수인 셈이다. 박근혜의 통일대박론은 그 극단적 예다.

국면이 바뀌면서 대화·타협으로 북한 붕괴에 이를 수 있다는 ‘변종’ 붕괴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본질은 붕괴론이다. 언제든 상황이 바뀌면 제재·압박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북한은 우리가 원한다고 곧 붕괴되지도 않고, 갑작스레 붕괴돼도 대박 아닌 쪽박일 가능성이 크다. 보수정권 9년의 역사가 붕괴론의 맹점을 잘 보여준다.

우리 민족의 미래는 남한 내에서 북한 붕괴 전략을 접고 ‘평화공존번영’ 노선으로 가는 데 절충점을 찾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수의 미래도 여기에 달려 있는지 모른다. 보수가 지금처럼 오래된 붕괴론의 미망에 집착한다면 미래는 극히 불투명하다. 그런 식이면 다가오는 총선, 대선도 기대하기 어렵다. 1972년 독일 총선에서 동서독기본조약에 반대한 기민당은 크게 패해 헌정사상 최초로 브란트의 사민당에 1당 지위를 빼앗기며 추락했다.

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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