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의 검찰수사 필요성이 거론되던 즈음 만난 고위 법관은 걱정이 많았다. “1차 사법파동 같은 일이 또 올 수 있습니다. 대법원, 서울고법부터 그럴 수 있어요.” 1971년 1차 사법파동은 현직 판사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에 항의해 당시 전국 법관의 3분의 1인 150여명이 사표를 낸 사건이다. 그때처럼 검찰이 나서면, 판사들도 그때처럼 집단행동을 할 것이라는 ‘걱정’이자 ‘경고’다. 반은 맞았다. 대법관들은 이례적으로 ‘재판 거래는 없었다’고 두 차례나 공동 입장을 냈고, 법원장들과 서울고법 부장판사들은 고발이나 수사 의뢰가 부적절하다고 의결했다. 하지만 그때와는 또 다르다. 사법파동이 법원을 길들이려던 정권에 대한 ‘저항’이라면, 이번에는 재판 독립이 내부자에 의해 훼손된 참사를 더 파헤치지 말자는 ‘만류’다. 그조차도 대법원장이 펼친 의견수렴의 멍석 위에서 벌어졌다. 무엇보다 법원 70년사의 일대 사건 앞에선 볼멘소리가 크게 들리기 어렵다. 이제는 ‘재판 거래는 없었다’는 선에서 버틸 모양이다. 법원 안에는 “수사로 결백을 입증받으면 된다”는 ‘털고 가자’ 못지않게 “수사할 일이 아니니 들쑤시지 말아야 한다”는 ‘믿고 덮자’도 많다.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은 재판 거래 의혹 문건에 대해 “(청와대 등에)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한 것 아니겠냐”고도 말했다. 실제 ‘재판 오염은 없다’는 주장이다. 그 말대로라면 그런 문서로 청와대와 거래한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 등은 사기범이다. 과연 그럴까. 검찰의 증거물 요구에 법원이 미적대는 것도 덮고 싶기 때문이겠다. 한 고위 법관은 전·현직 대법관 소환이든, 법률상 비밀인 재판부의 합의 과정 수사든 “검찰은 못한다”고 단언했다. 꼭 그럴까마는, 검찰수사가 법원의 결백을 증명하지도, 재판 오염을 기소하지도 못할 가능성은 적지 않다. 법원의 고민도 여기서부터겠다. 재판 거래 의혹이 사실로 확인되면 재판에 대한 신뢰가 존립의 근거인 법원은 뿌리부터 흔들린다. 증거가 모자라 혐의사실을 밝혀내지 못했다는 어정쩡한 결론은 더 위험하다. 의혹은 그대로 남고, 국민 마음속 의심의 씨앗은 뭉게뭉게 더 커지게 된다. 없다고 강변한들 없는 일이 될 수는 없다. ‘사태 이후’가 전면적인 법원 재건축이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권위와 신뢰가 허물어졌다면 어설픈 수리로는 안 된다. 국민의 신뢰를 배신한 잘못은 법적 책임과 무관하게 남김없이 들어내는 게 먼저다. 이어 법원을 다시 세울 기반을 다지고, 그 위에 판결 하나하나로 신뢰를 쌓아올려야 한다. 그러자면 깨어진 벽돌을 그냥 쓸 수는 없다. 사찰과 공작, 재판 거래 따위를 기획하거나 실행한 판사의 재판을 누가 믿을지부터 물어야 한다. 법원 개혁도 미적대다간 손을 뺏긴다. 해묵은 엘리트 사법과 사법 관료 체제를 대체할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일은 온전히 법원 몫이다. 그래도 남는 문제는 있다. 사법 불신의 상당 부분은 부실하고 늦은 재판에서 비롯된다. 사건이 워낙 많은 탓이다. 상고법원 도입도 애초엔 이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겠다. 혼란의 화근이라는 이유로 상고제도 개선을 뒤로 미룬다면 언제 또 터질지 모를 폭탄을 안고 가는 게 된다. 지금이라도 원점에서 전면적인 논의를 해야 한다. 상고법원이나 고법 상고부, 대법원 이원화 말고도, 상고허가제나 대법관 수의 획기적 증원 등 선택지는 충분하다. 법원을 재건축해야 하는 마당에 꺼리고 미룰 일은 없다. yeopo@hani.co.kr
칼럼 |
[아침햇발] 수리 아닌 재건축이 필요한 법원 |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의 검찰수사 필요성이 거론되던 즈음 만난 고위 법관은 걱정이 많았다. “1차 사법파동 같은 일이 또 올 수 있습니다. 대법원, 서울고법부터 그럴 수 있어요.” 1971년 1차 사법파동은 현직 판사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에 항의해 당시 전국 법관의 3분의 1인 150여명이 사표를 낸 사건이다. 그때처럼 검찰이 나서면, 판사들도 그때처럼 집단행동을 할 것이라는 ‘걱정’이자 ‘경고’다. 반은 맞았다. 대법관들은 이례적으로 ‘재판 거래는 없었다’고 두 차례나 공동 입장을 냈고, 법원장들과 서울고법 부장판사들은 고발이나 수사 의뢰가 부적절하다고 의결했다. 하지만 그때와는 또 다르다. 사법파동이 법원을 길들이려던 정권에 대한 ‘저항’이라면, 이번에는 재판 독립이 내부자에 의해 훼손된 참사를 더 파헤치지 말자는 ‘만류’다. 그조차도 대법원장이 펼친 의견수렴의 멍석 위에서 벌어졌다. 무엇보다 법원 70년사의 일대 사건 앞에선 볼멘소리가 크게 들리기 어렵다. 이제는 ‘재판 거래는 없었다’는 선에서 버틸 모양이다. 법원 안에는 “수사로 결백을 입증받으면 된다”는 ‘털고 가자’ 못지않게 “수사할 일이 아니니 들쑤시지 말아야 한다”는 ‘믿고 덮자’도 많다.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은 재판 거래 의혹 문건에 대해 “(청와대 등에)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한 것 아니겠냐”고도 말했다. 실제 ‘재판 오염은 없다’는 주장이다. 그 말대로라면 그런 문서로 청와대와 거래한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 등은 사기범이다. 과연 그럴까. 검찰의 증거물 요구에 법원이 미적대는 것도 덮고 싶기 때문이겠다. 한 고위 법관은 전·현직 대법관 소환이든, 법률상 비밀인 재판부의 합의 과정 수사든 “검찰은 못한다”고 단언했다. 꼭 그럴까마는, 검찰수사가 법원의 결백을 증명하지도, 재판 오염을 기소하지도 못할 가능성은 적지 않다. 법원의 고민도 여기서부터겠다. 재판 거래 의혹이 사실로 확인되면 재판에 대한 신뢰가 존립의 근거인 법원은 뿌리부터 흔들린다. 증거가 모자라 혐의사실을 밝혀내지 못했다는 어정쩡한 결론은 더 위험하다. 의혹은 그대로 남고, 국민 마음속 의심의 씨앗은 뭉게뭉게 더 커지게 된다. 없다고 강변한들 없는 일이 될 수는 없다. ‘사태 이후’가 전면적인 법원 재건축이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권위와 신뢰가 허물어졌다면 어설픈 수리로는 안 된다. 국민의 신뢰를 배신한 잘못은 법적 책임과 무관하게 남김없이 들어내는 게 먼저다. 이어 법원을 다시 세울 기반을 다지고, 그 위에 판결 하나하나로 신뢰를 쌓아올려야 한다. 그러자면 깨어진 벽돌을 그냥 쓸 수는 없다. 사찰과 공작, 재판 거래 따위를 기획하거나 실행한 판사의 재판을 누가 믿을지부터 물어야 한다. 법원 개혁도 미적대다간 손을 뺏긴다. 해묵은 엘리트 사법과 사법 관료 체제를 대체할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일은 온전히 법원 몫이다. 그래도 남는 문제는 있다. 사법 불신의 상당 부분은 부실하고 늦은 재판에서 비롯된다. 사건이 워낙 많은 탓이다. 상고법원 도입도 애초엔 이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겠다. 혼란의 화근이라는 이유로 상고제도 개선을 뒤로 미룬다면 언제 또 터질지 모를 폭탄을 안고 가는 게 된다. 지금이라도 원점에서 전면적인 논의를 해야 한다. 상고법원이나 고법 상고부, 대법원 이원화 말고도, 상고허가제나 대법관 수의 획기적 증원 등 선택지는 충분하다. 법원을 재건축해야 하는 마당에 꺼리고 미룰 일은 없다.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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