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11.22 17:48
수정 : 2018.11.22 19:42
김영희
논설위원
여성혐오 논란을 일으킨 래퍼 산이의 ‘페미니스트’엔 이런 부분이 있다. “여자와 남자가 현시점 동등치 않단 건 좀 이해 안 돼/ 우리 할머니가 그럼 모르겠는데 지금의 너가 뭘 그리 불공평하게 자랐는데/ 넌 또 OECD 국가 중 대한민국 남녀 월급 차이가 어쩌구저쩌구/ *ucking fake fact.” 썩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 많지만, 그의 해명대로 ‘지질한’ 남성의 위선을 비꼰 풍자일 수 있다. 분명한 건 이런 인식이 현실에 꽤 퍼져 있다는 점이다.
실제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부정할 순 없다. 경찰대가 남녀 구분 선발을 폐지키로 한 것은 상징적이다. 창업 7년 내 벤처 대표의 40%가 여성이라는 얘기엔 나도 깜짝 놀랐다. 초등학교 교사 같은 직군은 남성 비율 보장이 필요치 않나 진지하게 생각이 들 정도다. 지금 갈등과 혼란의 상당 부분은 분야별·직급별로 불균등한 변화의 ‘속도’ 그리고 이에 따른 ‘착시’에서 오는 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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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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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2~3년 차까지 별 차별을 못 느끼던 여성들이 작은 단위라도 이끄는 위치를 고민할 5~6년 차 이후면 달라져요. 롤모델이 없으니 과연 내게 미래가 있나 싶어하죠.” 지난주 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WCD 코리아) 창립 2주년 포럼 참석자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이들 중 일부가 여성 임원들의 모임 ‘윈’(WIN)을 만들어 10년 넘게 차세대 여성 리더를 위한 멘토링과 모임을 지속하는 이유다. 다른 나라와 비교할 것까지도 없다. 사원·대리에선 45%가 넘는 여성이 부장 7.4%, 임원 3.5%(여성정책연구원 패널조사)에 등기이사 2.16%라는 기이한 수치가 남성 중심의 의사구조와 문화를 빼고 출산·육아 탓으로만 설명될 수 있을까.
‘유리천장’에 작은 돌이 던져졌다. 세계여성이사협회는 지난 8월 최운열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12명이 ‘자산총액 2조원 이상 상장법인의 경우 특정 성의 이사가 3분의 2를 초과하지 않도록 한다’(2년 뒤 시행)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하는 데 협력했다. 이달 초에는 성 다양성이 잘 이뤄진 기업들에 투자하는 ‘메리츠 더 우먼펀드’ 출시도 이끌어냈다. 남성뿐 아니라 적잖은 여성이 할당제는커녕 이 정도의 목표제에조차 거부감을 가질지 모른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의사결정 구조의 다양성이 어떤 인위적 조처 없이 가능한지, 느린 변화의 속도가 갈등을 키우진 않는지, 의문이 갈수록 커진다. 여성뿐 아니라 젊은 남성들도 ‘워라밸’을 찾는 요즘, 다양성과 유연성을 결여한 조직문화의 기업이 지속 가능성과 경쟁력을 가질까도 싶다.
캐나다연금투자위원회가 지난해 여성 이사가 없는 45개 기업의 이사회 의장 선임에 반대표를 던지고 일본 공적연금이 매해 10조원을 여성친화기업에 투자하는 등 각국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여성 이사가 40%에 못 미치는 상장기업은 상장 폐지까지 하는 노르웨이 등 북유럽 국가만이 아니다. 인도, 말레이시아도 상장기업에 할당제를 도입했다. 민간에 강제 적용하는 게 당장 쉽지는 않지만, 공기업을 중심으로 한 변화가 로비와 접대 같은 상대 기업의 영업 관행을 바꾸는 ‘나비효과’를 일으킬 수도 있다. 아이티(IT) 업계 여성 1세대인 문효은 아트벤처스 대표는 “준비된 여성 풀이 없다는 말들을 늘 한다. 특정 세대엔 없을 수 있다. 그러면 젊은 사람, 비슷한 다른 분야 사람을 데려오면 된다. 발상의 전환과 시도 없이 기다린다고 격차는 줄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투 이후 가끔 여성 직원의 문제를 지적해야 할 때도 ‘차별’이란 오해를 살까 조심스럽다는 남성들의 ‘호소’를 듣는다. 대다수 여성 또한 ‘여성 아무개’가 아닌 ‘아무개’로서 평가받는 일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렇다면 이런 법안을 지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산이도 그러리라 기대한다.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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