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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1.27 17:49 수정 : 2018.11.27 19:42

여현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바이마르공화국(1919~1933)의 법원은 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공화파 법관단’은 300~400명이었지만, 보수 성향의 기존 ‘독일 법관단’은 1만2천여명이었다. 상당수가 극우정당 소속인 이들은 민주주의·의회주의를 폄하하면서 의회와 공화국 법률을 무력화하려 했다. 판결 하나하나도 대놓고 편파적이었다.

현대 법철학의 대명사로 법학 전 분야에 큰 영향을 끼친 구스타프 라드브루흐는 40대 중반에 두차례 바이마르공화국 법무장관을 지내면서 개혁을 시도했다. 귀족과 부르주아 상류계급이 독점하던 법률가직을 하층계급에 개방하고, 하층계급 자녀들에게 법학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려 했다. 법관 정년을 낮춰 젊은 피의 수혈도 시도했다. 당장 ‘볼셰비키’ ‘미친 사회주의자’라는 욕설을 들었다. 연립정부가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개혁 기조도 후퇴했다. 정부에선 황제 대신 공화국에 봉사하는 것을 불만스러워하는 법관과 공직자들에게 명예퇴진의 기회를 제공했지만, 물러난 이는 0.15%였다. 보수파의 법조계 석권은 계속 이어졌다.(이재승 <바이마르공화국과 라드브루흐의 법철학> 참조)

그 뒤 일어난 일이 나치 시대 ‘법의 이름으로 자행된 불법’과 ‘법관의 사법살인’이다. 법률가들이 나치에 부역한 결과다. 라드브루흐는 1946년 <법률적 불법과 초법률적 법>에서 히틀러를 비난하는 화장실 낙서를 했다는 이유로 처형된 상인 괴티히 사건을 들어, “괴티히에게 유죄판결을 한 법관은 모살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인도성의 요청과 양립할 수 없는 판결을 내리고, 사소한 이유로 사형을 선고했던 법관은 소추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고 말했다.

독일에선 개혁 실패 뒤 나치 부역이라는 비극적 참화가 이어졌지만, 지금 한국 법조에는 재판거래라는 초유의 참화 뒤 새롭게 개혁이 요구되고 있다. 어쩌면 다행일 수도 있다. 아직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개혁은 쉽지 않다. 법관이 좀체 먼저 그만두지 않는 것부터 그때와 비슷하다. 사법농단에 관여한 법관들이 물러나는 것이 그나마 개혁의 첫걸음인데, 연루된 법관들은 하나같이 그만둘 생각이 없는 듯하다. 버젓이 재임용을 신청한 이도 있다. 스스로 책임을 지고 물러나기에는 용기와 성찰이 부족한 것일까. ‘부서진 벽돌’을 둔 채 법원을 재건축하기는 어렵다.

법관 탄핵을 거론한 전국법관대표회의 결의에 대해서도, 과하다는 반발이 있다. 그런 주장들은 얼핏 다양해 보이지만, 실은 ‘사법농단 사건이 법관 탄핵까지 거론할 정도로 심각한 헌법 위반 행위’라는 본질은 외면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면서 곁가지에 목소리를 높인다.

대법원이 사법행정권 남용에 관여한 법관 13명의 징계절차를 재개한 것도 어색하다. 법관 징계는 정직 1년이 최고 수위다. 그 정도로 끝낼 일이었다면 애초 이 지경에 이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재판을 두고 권력과 거래하거나 편의를 제공하고, 동료를 사찰하거나 불이익을 주는 따위의 ‘사법농단’은 재판의 독립, 법관의 독립을 정면으로 침해한 헌법 위반이다. 잔류 가능성을 열어둔 징계가 그에 상응하는 책임일 수는 없다.

일각에선 사법농단 사태의 피해자가 사법부라는 생각도 있는 모양이다. 착각이다. 진짜 피해자는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당한 국민이다. 이를 치유할 개혁도 법원의 전유물일 순 없다. 내부징계로 사태를 미봉하려 하거나, 의견 수렴을 핑계로 개혁안을 입맛대로 바꾸려 들진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랬다간 나중에 어떤 참화가 이어질지 모른다.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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