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된 지 열흘가량 지났다. 엄중한 언어에 어울릴 정도의 사태 전개가 보이지 않는 건 눈이 어두워서인가, 아니면 안전 불감증에 위기 둔감병이 겹쳐서인가. 비상사태 선포자가 세계적 석학인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장하준 교수인데. 안전 불감과 위기 둔감을 반성한다는 말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석학의 발언을 담아낸 인터뷰 기사가 나왔으면 밑줄 쳐 가며 읽고 곱씹고 숙지해야 마땅하거늘 ‘비상사태’라는 제목에 눈살을 찌푸렸다가 ‘최저임금’ 발언 대목에서 고개를 조금 끄덕이고는 덮고 말았으니. ‘비상사태’가 칼럼·사설에서 반복적으로 소비되고 팟캐스트 도마에도 오르기에 반성 삼아 뒤늦게 다시 찾아 읽어봤다. 장 교수가 진단하는 한국 경제의 문제는 “20년간 쌓인 투자 부족과 신기술 부족으로 주축 산업이 붕괴한 게 원인”이다. 이어 내년도 전망, 소득주도 성장과 포용적 성장에 대한 문답이 이뤄진 뒤 ‘대안이 뭐냐’는 질문에서 문제의 발언이 등장한다. “국가 비상사태라는 인식을 가져야 해결책이 찾아진다.” 요약하면 기업 정책을 잘 써서 투자를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투자가 위축돼 있는 요즘 상황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투자 부족이 20년간 이어져왔다는 게 이번 인터뷰에서 거론된 핵심 논거다. 외환위기 이전의 과잉 투자는 말할 필요조차 없고, 그 뒤에도 투자는 적지 않았는데. 국내총생산(GDP) 대비 총투자율이 31.2%(2017년)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라는 사실은 어떻고. 삼성전자가 전세계 기업 중 연구개발(R&D) 투자를 가장 많이 한 기업이라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의 ‘2018 산업 연구개발 투자 스코어보드’ 내용이 알려진 게 지난 12일이다. 삼성전자에만 규제를 풀어주고, 삼성전자만을 위한 ‘특급 비밀’ 기업 정책을 쓴 모양이다. 비상사태라면서 제시한 해법도 뜨악하다. 비상사태에는 비상조처가 따라야 할 텐데, 소득주도 성장과 최저임금 인상은 대증요법일 뿐이고, 체질 개선을 해야 한다니. 응급실 찾아온 환자더러 근육운동 하라는 것으로 들린다. ‘차세대 산업’을 꼽아 달라는 주문에는 “과거 중화학공업 대여섯개를 하듯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 주도로 그게 잘될, 그런 시대인지 정말 믿고 하는 조언이었을까. 미국의 ‘팡’(FAANG, 페이스북·아마존·애플·넷플릭스·구글)이 산업 정책 덕에 탄생한 것인가? 석학 나름의 충언을 한국 경제에 전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으되 정말이지 ‘비상사태’라는 말, 너무했다. 이걸 뒷받침하는 데이터마저 적합한지 의문이고. 석학의 발언이라는 이유로 담론 시장은 물론, 정부 정책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연하다. 더 딱한 것은 정부다. 17일 발표된 정부의 ‘2019년 경제정책 방향’에서 ‘투자 활성화’는 넘쳐나고, 산업생태계 조성과 직결되는 ‘공정 경제’의 흔적은 희미하다. ‘장 교수들’을 숙주로 삼은 ‘그들’이 조금씩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게 아니길 바랄 뿐이다. ‘그들의 성공’이 ‘한국 경제의 성공’으로 이어질 것 같지 않아서다. 민생이 어렵다는 걸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대기업-중소기업 격차로 대표되는 양극화, 자영업의 어려움, 고용난, 가계부채와 높은 집값 문제. 꼽자면 숱하다. 정부의 책임도 적지 않다. 이해관계자들의 조정 실패, 필요한 규제와 필요 없는 규제의 정교한 분리 실패 따위. 그렇다고 지진이나 전쟁 같은 일로 빚어진 국가 시스템 붕괴에나 어울릴 언사가 온당한지 모르겠다. 정부의 냉철한 분별력이 절실해진 때다. kimyb@hani.co.kr
칼럼 |
[아침햇발] 장하준 교수님, ‘진심’이었던가요? / 김영배 |
논설위원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된 지 열흘가량 지났다. 엄중한 언어에 어울릴 정도의 사태 전개가 보이지 않는 건 눈이 어두워서인가, 아니면 안전 불감증에 위기 둔감병이 겹쳐서인가. 비상사태 선포자가 세계적 석학인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장하준 교수인데. 안전 불감과 위기 둔감을 반성한다는 말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석학의 발언을 담아낸 인터뷰 기사가 나왔으면 밑줄 쳐 가며 읽고 곱씹고 숙지해야 마땅하거늘 ‘비상사태’라는 제목에 눈살을 찌푸렸다가 ‘최저임금’ 발언 대목에서 고개를 조금 끄덕이고는 덮고 말았으니. ‘비상사태’가 칼럼·사설에서 반복적으로 소비되고 팟캐스트 도마에도 오르기에 반성 삼아 뒤늦게 다시 찾아 읽어봤다. 장 교수가 진단하는 한국 경제의 문제는 “20년간 쌓인 투자 부족과 신기술 부족으로 주축 산업이 붕괴한 게 원인”이다. 이어 내년도 전망, 소득주도 성장과 포용적 성장에 대한 문답이 이뤄진 뒤 ‘대안이 뭐냐’는 질문에서 문제의 발언이 등장한다. “국가 비상사태라는 인식을 가져야 해결책이 찾아진다.” 요약하면 기업 정책을 잘 써서 투자를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투자가 위축돼 있는 요즘 상황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투자 부족이 20년간 이어져왔다는 게 이번 인터뷰에서 거론된 핵심 논거다. 외환위기 이전의 과잉 투자는 말할 필요조차 없고, 그 뒤에도 투자는 적지 않았는데. 국내총생산(GDP) 대비 총투자율이 31.2%(2017년)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라는 사실은 어떻고. 삼성전자가 전세계 기업 중 연구개발(R&D) 투자를 가장 많이 한 기업이라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의 ‘2018 산업 연구개발 투자 스코어보드’ 내용이 알려진 게 지난 12일이다. 삼성전자에만 규제를 풀어주고, 삼성전자만을 위한 ‘특급 비밀’ 기업 정책을 쓴 모양이다. 비상사태라면서 제시한 해법도 뜨악하다. 비상사태에는 비상조처가 따라야 할 텐데, 소득주도 성장과 최저임금 인상은 대증요법일 뿐이고, 체질 개선을 해야 한다니. 응급실 찾아온 환자더러 근육운동 하라는 것으로 들린다. ‘차세대 산업’을 꼽아 달라는 주문에는 “과거 중화학공업 대여섯개를 하듯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 주도로 그게 잘될, 그런 시대인지 정말 믿고 하는 조언이었을까. 미국의 ‘팡’(FAANG, 페이스북·아마존·애플·넷플릭스·구글)이 산업 정책 덕에 탄생한 것인가? 석학 나름의 충언을 한국 경제에 전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으되 정말이지 ‘비상사태’라는 말, 너무했다. 이걸 뒷받침하는 데이터마저 적합한지 의문이고. 석학의 발언이라는 이유로 담론 시장은 물론, 정부 정책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연하다. 더 딱한 것은 정부다. 17일 발표된 정부의 ‘2019년 경제정책 방향’에서 ‘투자 활성화’는 넘쳐나고, 산업생태계 조성과 직결되는 ‘공정 경제’의 흔적은 희미하다. ‘장 교수들’을 숙주로 삼은 ‘그들’이 조금씩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게 아니길 바랄 뿐이다. ‘그들의 성공’이 ‘한국 경제의 성공’으로 이어질 것 같지 않아서다. 민생이 어렵다는 걸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대기업-중소기업 격차로 대표되는 양극화, 자영업의 어려움, 고용난, 가계부채와 높은 집값 문제. 꼽자면 숱하다. 정부의 책임도 적지 않다. 이해관계자들의 조정 실패, 필요한 규제와 필요 없는 규제의 정교한 분리 실패 따위. 그렇다고 지진이나 전쟁 같은 일로 빚어진 국가 시스템 붕괴에나 어울릴 언사가 온당한지 모르겠다. 정부의 냉철한 분별력이 절실해진 때다. kimyb@hani.co.kr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