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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4.04 15:54 수정 : 2019.04.04 21:54

고명섭
논설위원

지난달 정치학자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3·1운동 100돌 기념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글이 ‘보수’로 자처하는 신문들의 조명을 받았다. 이 논문이 문재인 정부의 친일 청산 노력을 ‘관제 민족주의’라고 비판한 것이 친일·독재 세력에 유대감을 느끼는 이 신문들의 입맛에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신문들의 역사인식의 저열함은 그것 자체로 문제이지만, 이런 인식을 부끄러움도 없이 드러내는 데 최장집 논문이 동기와 빌미를 주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 논문은 과잉해석과 논리적 비약과 비학술적 과장으로 점철돼 있다. 평소 절제된 언어를 구사해온 학자의 글답지 않게 선동적인 문구가 빈발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1일 오전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제100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논문의 여러 문제점 중 몇 가지만 짚어보면 먼저, 문재인 대통령이 3·1절 100돌 기념사에서 ‘빨갱이’란 말을 비판한 것을 염두에 두고 “지극히 갈등적인 문화투쟁”이며 “수십년 동안 보지 못했던 이념적 분열상”을 재현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대목이다. 이 주장은 전형적인 과장이다. 빨갱이라는 말이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면서 쓴 말이고, 해방 뒤 친일청산을 가로막는 도구가 됐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민주화운동가들의 인권을 말살할 때도 이 말이 동원됐고, 지금도 남북 화해 흐름을 공격하는 무기로 쓰이고 있다. 빨갱이라는 말은 우리 정치를 근원적으로 굴절시킨 배제와 억압의 언어다. ‘빨갱이 담론’을 철거하지 않고는 우리 정치는 온전한 상태로 올라설 수 없다. 최장집 논문은 우리 사회를 분열시켜온 문제의 뿌리를 외면하고, 오히려 그런 문제를 극복하자는 호소를 분열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본말전도의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둘째, 최장집 논문이 친일 잔재를 청산하고 남북의 이념적 대결을 극복하자는 운동을 ‘관제 민족주의’라고 규정하는 것도 과도한 비판이다. 관제 민족주의의 전형을 찾자면, 박정희 독재 시절의 ‘국민 교육 헌장’일 것이다. 박정희가 주창한 ‘한국적 민주주의’가 ‘민주’ 없는 가짜 민주주의였듯이, 박정희의 관제 민족주의도 민족 없는 사이비 민족주의였다. 박정희식 관제 민족주의에 맞서 당시 재야는 분단 극복을 지향하는 민족주의를 주장했다. 민족주의가 여전히 긍정적인 이념으로 살아 있다면, 휴전 이후에도 60여년 동안 ‘저강도 전쟁’ 상태에 놓인 이 한반도를 평화와 화해의 땅으로 만들자는 열망이 그 민족주의로 표출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노력을 관제 민족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지나치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셋째, “정치에서 역사청산은 목표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대목이다. 이 주장이 옳다면, 넬슨 만델라 집권 이후 남아공에서 벌어진 ‘아파르트헤이트’(흑백차별정책) 청산 작업은 도대체 무엇인지 물을 수밖에 없다. 남아공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가 한 것이야말로 정치의 본령이다. 인종차별의 역사를 청산하는 그 정치적 과정을 통해 화해가 가능하다는 만델라의 대의는 우리 사회에서 ‘빨갱이’로 대표되는 배제와 억압의 역사를 청산하고 새 시대를 만들자는 요구와 다르지 않다. 정치에서 역사 청산이 목표가 되는 것은 지극히 온당하며 정치의 의무이기도 하다.

넷째, 최장집 논문이 ‘분단 극복 노력’을 “한반도의 통일은 민족의 지상과제고 통일을 실현하는 것 없는 미래는 아예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비학술적인 과장법이다. 이 논문이 비판한 ‘일국으로의 통일’은 지금의 분단 극복 세력의 주장이라기보다는 남북 화해에 반대해온 정치세력의 요구에 가깝다. 평화적 공존을 통한 점진적 통합이 아니라, 공격적이고 적대적인 방식으로 통일을 기획한 세력의 언술이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권은 전쟁통일을 염두에 두었고, 김영삼-이명박-박근혜 정권은 흡수통일을 꿈꾸지 않았던가.

최장집 논문은 현실을 정확하게 겨냥하지 못하고 허수아비를 공격하는 실망스러운 글이다. 그런데도 그 글이 ‘보수언론’의 환영을 받은 것은 친일 잔재 극복과 남북 화해·협력 흐름을 막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반길 태세가 돼 있는 사람들에게 써먹기 좋은 재료를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원로 학자의 행보가 더 위태로워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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