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4.09 18:57
수정 : 2019.04.09 22:05
신승근
논설위원
정치인의 전문성을 굳이 하나 꼽는다면 ‘말재주’가 아닐까 싶다. 시대정신을 간파한 명징한 연설은 부당한 권력과 싸움을 견뎌낼 용기를 줬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 땅의 양심들을 흔들어 깨웠다. “이런 아내를 제가 버려야 합니까. 그러면 대통령 자격이 있습니까.” 장인의 좌익 경력을 트집 잡는 보수언론과 상대 후보에 맞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연설은 색깔론의 본질을 드러내고 대선후보 경선 판도를 바꾼 명장면으로 기억된다.
정치인이 더는 일생을 걸고 세상을 바꾸는 엄혹한 소명으로서의 직역이 아니라 기득권의 징표, 또 하나의 직업이 된 정치판에 이젠 ‘입만 산’ 이들이 그득하다. “‘촛불정부’인 줄 알았더니 ‘산불정부’네요.” 김문수 전 경기지사는 그 상징이 됐다. 비유의 저급함 때문만이 아니다. 국가적 재난인 속초·고성 산불에 대한 오판과 비아냥으로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와 민경욱 대변인이 잇따라 ‘동네북’이 됐으니 자기통제가 작동할 법한데, 버젓이 막말을 보탰다.
막말, 대통령을 향한 야당의 극언은 새삼스러울 게 없다. 김홍신 한나라당 의원은 “김대중 대통령은 거짓말을 많이 해 공업용 미싱으로 입을 박아야 한다”고 했고, 한나라당 의원들은 연극 <환생경제>로 노무현 대통령을 “육×× 놈, 개×놈”이라고 조롱했으며, 이종걸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은 “박근혜 그년”이라 불렀다. 정치권은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막말은 전염성 강한 바이러스처럼 창궐하고, 이젠 일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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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지난 4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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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생태계가 어느덧 막말 정치인이 기생할 숙주로서 최적의 조건을 두루 갖춘 탓이다. 첫째, 편가르기 일상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좌파독재’ ‘좌파폭정’을 입에 달고 산다. 2019년 대한민국이 좌파독재 국가인지 의문이 들지만, 그에겐 중요하지 않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대통령을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라며 가세한다. 카타르시스를 느낀 지지자는 결집한다. 둘째, 역사인식 부재와 소명의식 결여. 반민특위로 국론이 분열됐다는 나 원내대표 발언, 김진태·김순례·이종명 의원의 ‘5·18 망언’은 권력의지가 충만할 뿐 별다른 자기희생 없이 기득권을 꿰찬 이들에게 드러나는 자기확신의 전형이다. 셋째, 공감능력 상실. ‘태극기부대’나 극우언론과 상당한 싱크로율을 기록한 자유한국당의 공감능력은 논외로 하자. ‘인사 참사’에 집 3채 보유, 유학하는 자식에게 포르셰·벤츠를 사준 게 “무슨 문제냐”는 국민소통수석의 발언은 촛불정부를 자임하는 청와대의 참모들조차 공감능력을 잃었다는 증거다. 그들의 사회·경제적 지위에선 팍팍한 서민의 삶이 가슴에 와닿지 않는 비현실적인 현실일 게다.
이런 정치 생태계를 숙주 삼아 생존해온 정치인은 막말로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많다는 집단적 경험을 공유한다. 잠시 숙이면 그뿐이라는 걸 잘 안다.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라는 ‘귀태’ 발언으로 원내대변인에서 물러났던 홍익표 의원은 현재 더불어민주당 수석대변인이다. 지난 6·13 지방선거 때 ‘이부망천’(이혼하면 부천, 망하면 인천) 발언으로 쫓겨난 정태옥 자유한국당 대변인도 1월에 슬그머니 복당했다. ‘5·18 유공자는 괴물집단’이라고 망언한 김순례 의원은 ‘2·27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이 됐다. 초선 비례인 그는 막말로 인지도가 상승한 덕을 봤다.
이들이 막말로 정치적 이득을 누릴수록 공동체는 황폐화한다. 국민은 더 깊은 정치혐오에 빠지고, “원래 그런 놈들”이라고 일반화한다. 그들은 이렇게 ‘막말 면허’를 획득한다. 곧 잊힐 것이라 확신한다. 기억하고, 심판하고, 낙선시켜야 하는 이유다. 막말을 진영논리로 정당화하고, 쾌감을 느끼며 부추겨선 더욱 안 된다. 홍준표 전 대표의 몰락을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다. 연탄가스, 고름덩어리, 쓰레기…. 무수한 막말 논란에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다고 말한 데 미운털이 박혀 등장한 프레임’이라며 맞섰지만, 결국 퇴장당했다. 가장 확실한 막말 바이러스 퇴치법은 기억하고, 심판하는 것이다. 그래야 민중은 개돼지와 같다는 공직자도 사라지고, ‘산불정부’의 국민이 되는 모욕도 피할 수 있다.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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