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4.30 15:21
수정 : 2019.04.30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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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2년 중국 충칭에서 ‘좌우합작’의 통합정부를 이뤘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축인 한국독립당이 꾸려온 임시의정원에 그해 보선을 계기로 하여 좌파인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 진출했다. 맨앞줄 왼쪽 네번째부터 한국독립당 소속인 홍진 임시의정원 의장, 김구 임시정부 주석. 앞줄 오른쪽 끝에 앉은 이가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이다. 좌우를 망라한 통합의회 구성을 기념해 임시의정원 의원 46인이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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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돌을 맞아 ‘임시정부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역사학계의 쟁점으로 떠올랐다. 얼마 전 역사문제연구소를 비롯한 역사학 단체 3곳이 학술회의를 열어 정부 주도의 임시정부 기념사업을 문제 삼고 나섰다. 이 학술회의 주장을 요약하면, ‘임정 법통론을 중심으로 한 역사전쟁이 국가주의를 고취하고 남북 대결 의식을 부추겨 냉전 논리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경청할 만한 점이 없지 않지만, 동시에 ‘가능성’을 ‘필연성’으로 몰아가는 과도한 단순화라는 지적도 받을 수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 전체를 아우르지 못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주의 공산주의 계열 항일무장투쟁 세력이 빠진 것이 단적인 사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내내 정부 형태를 유지하며 해방 때까지 명맥을 이어온 유일한 조직이 임시정부였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1919년 3·1운동의 거족적 항거로 세워진 상하이 임시정부는 우파에서 좌파까지 포괄한 나름의 통합정부였다. 1923년 소집된 국민대표회의가 분열로 끝난 뒤 힘이 떨어졌지만,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거로 활로를 찾았고 1942년 의열단의 김원봉을 포함해 좌파 세력이 함께하는 통합정부로 다시 등장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1945년 해방 후 가장 시급한 민족적 과제가 통일 자주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시기에 통일국가 건설의 유력한 방안으로 제시된 것이 좌우통합, 좌우합작이었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중도파가 중심이 된 좌우합작 노선은 미군정의 개입과 좌우익 충돌로 결국 좌절하고 말았고, 그 필연적 귀결이 한국전쟁이었다. 남북이 다시 화해하고 평화로운 과정을 거쳐 통일로 가려면 좌우통합의 중도적 정신으로 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 남북이 만날 수 있는 이념적 중립지대로 고려해볼 수 있는 것이 1941년 임시정부 건국강령의 토대와 기둥을 제공한 조소앙의 삼균주의다.
조소앙이 항일투쟁의 험로 위에서 구축한 삼균주의는 당시 분열된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하려는 의지를 정치이념으로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삼균주의가 정치·경제·교육에서 균등(평등)을 주창한 이론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오늘날 유행하는 말로 하면 ‘민주사회주의’ 이념이다. 조소앙은 이 ‘삼균’의 대전제로 인간과 인간,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완전 평등을 내세웠다.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민족해방과 평등국가의 사상적 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해방 뒤 남북과 좌우를 아우르는 통일국가의 초석으로 삼을 만한 이념이었음이 분명하다.
기원을 따지는 일은 족보학이 될 수도 있고 계보학이 될 수도 있다. 족보학은 오늘 우리의 자긍심을 선조의 위대함을 통해 확증하려는 것이며, 계보학은 지금 우리의 모습이 어떤 경로를 거쳐 형성됐는지를 성찰하는 작업이다. 대한민국이 상하이 임시정부를 뿌리로 한다는 우리 헌법의 서사가 족보학적 성격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역사를 어떤 해석의 지평 위에 놓고 볼 것이냐 하는 것은 계보학적 문제다. 임시정부 정통성 옹호가 남한 국가주의 강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필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임시정부 정통성 되찾기 운동이 ‘1948년 단독정부 수립’을 건국의 기점으로 삼으려는 극우·수구 세력에 맞선 역사해석 싸움의 과정에서 강화됐음을 생각하면, 임시정부 기억 투쟁은 반북대결로 이어지기보다는 민족통합의 가교가 될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임시정부의 주역인 백범 김구가 단독정부를 거부하고 남북협상에 나섰다는 사실은 임정의 통합 정신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릿 카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지만, 더 과감하게 말하면 역사는 ‘과거와 미래의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미래를 만들 것인가 하는 물음에 놓인 과제 상황이야말로 역사를 해석하는 결정적 준거가 되기 때문이다. 임시정부의 역사 속에 좌우통합의 정신이 살아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은 반공·분단 국가주의를 넘어 남북의 화해와 통합으로 가는 길을 여는 일이 될 것이다.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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