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5.16 19:08
수정 : 2019.05.17 11:07
안재승
논설위원실
공정거래위원회는 매년 5월 대기업집단(재벌)과 동일인(총수)을 지정한다. 재벌의 경제적 집중을 억제하고 일감 몰아주기 등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를 규제하기 위해서다. 재벌은 자산 총액(5조원 이상)을 기준으로 지정되고, 총수는 해당 재벌이 누구로 할지 신청하면 공정위가 적합성을 검토해 지정한다.
올해는 59개 재벌이 지정됐는데, 이 중 한진그룹만 공정위가 총수를 직권으로 지정했다. 한진이 총수 지정을 신청하지 않자 공정위가 그룹 지주사인 한진칼의 조원태 회장을 총수로 지정한 것이다. 이례적인 일이다.
총수 직권 지정이 전례가 없지는 않다. 지난해엔 삼성그룹과 롯데그룹의 총수로 이재용 부회장과 신동빈 회장이 지정됐다. 의식불명 상태인 이건희 회장과 치매 증세가 있는 신격호 명예회장이 경영 활동을 하지 못하는데도 삼성과 롯데가 총수 변경을 신청하지 않자 공정위가 총수 교체를 요청했다. 삼성과 롯데는 부친이 아직 생존해 있는데 아들이 총수 자리에 오르겠다고 하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의견을 전달했고, 공정위가 총수를 직권으로 변경했다. 결과적으로 공정위의 힘을 빌려 총수를 교체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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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김승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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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의 경우는 삼성이나 롯데와 다르다. 조양호 회장의 별세 뒤 공정위는 총수 변경을 한진에 거듭 요청했으나 한진은 “내부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기한 안에 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조 회장의 세 자녀인 조원태 한진칼 회장,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 그리고 부인인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이 그룹 경영권을 놓고 갈등을 벌이고 있다는 얘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조원태 회장이 그룹을 독차지하려고 시도하자 누나와 동생이 강력히 반발하고 여기에 어머니까지 가세했다는 것이다. 그룹 안팎에선 터질 게 결국 터졌다는 반응이 나온다. “가족들과 잘 협력해서 사이좋게 이끌어나가라”는 조양호 회장의 마지막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조양호 회장의 유언이 공개되지 않아 그의 한진칼 지분(17.84%)이 어떻게 나눠질지 알 수 없다. 만약 유언이 없고 법정상속이 진행된다면 기존 지분을 합쳐 조원태 회장이 6.3%, 조현아 전 부사장이 6.27% 조현민 전 전무가 6.26%, 이명희 전 이사장이 5.95%를 보유하게 된다. 거의 차이가 없다.
자질 면에서도 3남매 가운데 누가 더 낫다고 하기 어렵다. 조 전 부사장은 ‘땅콩 회항’으로, 조 전 전무는 ‘물컵 갑질’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경영에서 물러났다. 조원태 회장도 누나나 동생 못지않다. 교육부는 지난해 조원태 회장이 1998년 한진그룹 계열인 인하대에 부정 편입학한 사실을 적발하고 편입과 졸업을 모두 취소하라고 통보했다. 조 회장은 2000년엔 차선 위반을 단속하는 교통경찰을 치고 100m가량 달아나다 붙잡혔고, 2005년엔 차량 끼어들기 시비를 벌이다 70대 할머니를 넘어뜨리고 폭언을 했다. 그때마다 회사가 나서서 사건을 무마했다.
공정위 발표를 보면, 올해 총수 자리가 3, 4세로 넘어간 재벌이 3곳이다. 앞으로 더 빠르게 늘어날 것이다. 현재 총수의 고령과 건강 등의 문제로 머지않아 3, 4세가 총수 자리를 이어받을 곳이 11개에 이른다. 재벌 3, 4세들은 창업주인 할아버지나 아버지 세대와 다르다. 창업주들은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 기업을 일으켜 세웠다. 2세들은 이를 옆에서 지켜보고 거들면서 성장했다. 반면 3, 4세들은 기업이 재벌의 반열에 오른 뒤 태어났고 부모 회사에 들어가 초고속 승진을 하며 어린 나이에 임원 자리에 올랐다.
물론 재벌 3, 4세라도 경영 능력과 자질을 공개적으로 검증받고 상속세를 제대로 냈다면 경영권 승계가 문제 될 게 없다. 전문경영진 체제가 오너 경영보다 낫다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능력과 자질이 떨어지는데도 경영권을 물려받는 것은 옳지 않다. 본인만 망하면 상관없는데, 기업이 끊임없이 ‘오너 리스크’에 시달리고 아무 잘못도 없는 직원과 주주까지 고통받는다. 한진이 단적인 사례다.
스스로 능력과 자질이 안 된다고 판단되면 무리하게 ‘경영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 경영은 능력과 신망을 갖춘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자신은 그냥 대주주로만 남아 있는 게 좋다. 기업이나 국가경제뿐 아니라 본인을 위해서 그게 바람직한 선택이다.
js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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