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5.28 16:05
수정 : 2019.05.28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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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9월19일 백화원 영빈관에서 정상회담을 마친 뒤 평양공동선언서에 서명한 뒤 펼쳐 보이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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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2월 노태우 정부의 정원식 총리와 북한의 연형묵 총리가 서명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 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 관계”라고 선언했다. 이 합의서는 이후 남북 사이에 맺어진 모든 합의문의 기초가 됐다. 지난해 남북 정상이 서명한 판문점선언과 평양공동선언도 이 합의서를 기초로 하고 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 합의서 제6조에는 남북이 “국제무대에서 대결과 경쟁을 중지하고 서로 협력하며 민족의 존엄과 이익을 위해 공동으로 노력한다”는 문구도 들어 있다. 남북이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7·4 남북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통일을 지향하는 민족 내부 관계임을 이 합의서는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4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남쪽을 향해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돼야 한다”고 한 것은 남북기본합의서의 문구를 충실히 따라, 자기 처지에서 할 말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남북 관계는 민족 내부의 특수 관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이기도 하다. 남북기본합의서가 체결되기 석달 전인 1991년 9월 남북은 유엔에 동시에 가입했다. 유엔 동시 가입은 남북이 서로를 부정하던 과거에서 벗어나 상대방을 독립된 주권국가로서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북기본합의서 체결과 남북 유엔 동시 가입이라는 두 사건을 아울러 보면, 남과 북은 상대방의 주권을 존중하는 독립된 국가 관계임과 동시에 통일을 향해 나아가는 민족 내부의 특수 관계라는 모순적인 결론이 나온다.
문제의 김 위원장 발언은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빈손으로 끝난 뒤 나온 것이다. 비핵화 협상이 막히자 남쪽을 향해 불만을 표출한 것인데, 북한이 언제나 이런 태도만 보인 것은 아니다. 북-미 관계가 풀려나갈 때 북한은 남한의 촉진자 역할을 환영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이 지난해 평양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역사적인 북-미 상봉은 문 대통령의 덕’이라며 고마움을 표시한 것이 단적인 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북-미 관계와 남북 관계는 서로 떼어내기 어려운 긴밀한 연동 관계에 있다. 북-미 협상에서 나타나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와 남북협력으로 표출되는 ‘민족 내부의 특수 관계’는 선순환을 이루기도 하지만 모순의 증폭으로 악순환에 빠지기도 한다. 북한이 남한을 향해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되라고 했지만, 정작 남쪽에서 개성공단 기업인 방북을 허용했는데도 묵묵부답인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북-미 관계가 막혀 있을 때는 남북 관계도 풀어나가기 어렵다는 것을 북한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북-미 관계가 어렵다고 해서 남북 관계까지 방치하는 것은 상황을 더 나쁜 쪽으로 끌고 가는 일이 될 뿐이다.
이럴 때 거듭 상기해야 하는 것이 한반도 운전자로서 남한의 역할이다. 문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우리가 한반도 문제의 주인으로서 운전대를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반도 문제의 운전자가 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북-미 관계의 촉진자 역할과 남북 관계의 당사자 역할을 높은 차원에서 종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북한의 상황은 국제적 고립 상태에서 핵을 껴안고 농성투쟁을 벌이는 것과 같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국제사회로 나오게 하려면 우리의 행보가 지금보다 훨씬 더 과감해져야 한다. 미국의 외교안보 주류는 비핵화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북한 핵을 빌미로 삼아 동북아 긴장 상태를 유지·관리하면서 이 지역에 무기를 팔고 중국을 견제하는 것을 최상의 동북아 전략으로 여기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런 미국 주류의 생각에 포섭되면 비핵화 문제는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지금과 같은 상태로 기약 없이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분단의 질곡을 숙명으로 안고 냉전의 유산 아래 짓눌려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한반도 운전자로서 문재인 정부의 소임이 막중하다.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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