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5.30 18:56
수정 : 2019.05.30 20:25
신승근
논설위원
투쟁인지, 대선용 전국 순회인지 잘 구분 안 되는 ‘민생투쟁 대장정’을 마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현장은 지옥과 같았습니다. 시민들께서는 ‘살려달라’ 절규했습니다.” 18일 동안 방방곡곡 4080㎞를 누비며 팍팍한 시민의 삶을 눈여겨봤다니 다행이다. 그는 “사회는 위태롭기 그지없습니다. 제2의 아이엠에프(IMF) 같습니다”라며 “왜 대통령은 국민을 보지 못합니까?”라고 엄중하게 물었다.
보수언론, 야당은 언제나 경제가 위기라고 선동했다. 아무렴 ‘국가부도의 날’만 할까 싶다. 그렇지만 모두 정말 힘겨운 시절을 견디고 있다는 건 절감한다. 40년 지기 초등학교 친구는 20년을 이어온 장사를 보름 뒤면 접는다. 먹거리를 팔아온 그는 광화문 인근에서 대박을 낸 적도 있고, 경기에 따라 부침도 겪었다. 이젠 “더 버티는 게 의미 없다”고 했다. 점심시간에 긴 줄 서던 곳인데 더 지갑을 안 연단다. “제2의 아이엠에프가 올 거”라며 점심까지 거르는 이도 있단다. 엄살이 아니다. 건물 청소 제대로 안 한다고 임차인을 내보내던 막무가내 건물주도 나긋해졌단다. 임대료 내려줄 테니 남아달라고 사정한단다. 앞집 해물탕 전문점이 철수한 뒤 몇달째 공실이 지속되자 조물주 위 건물주도 어쩔 수 없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침 6시에 나와 자정에 귀가했지만 한달에 200만원씩 적자라며 지속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황 대표의 ‘민생 지옥’은 과장이 있을 수 있지만 터무니없는 진단은 아니란 생각이다.
|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가 29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
문제는 황 대표의 선택, 나경원 원내대표와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행동이다. 민생 지옥, 사회가 위태롭다면 제1야당은 어떤 길을 가야 할까.
선택 1: 대승적 결단으로 국회에 들어간다. 예산, 입법으로 민생문제 해결을 위해 투쟁한다.
선택 2: 들어줄 수 없는 조건을 내건다. 정부를 탓하며 공세를 이어간다.
책임 있는 지도자라면 첫번째 선택이 상식일 것이다. 국회는 지난달 5일 본회의 이후 30일 현재 55일째 공전을 거듭하고 있다. 장외 집회로 지지층도 다졌다. 국회 복귀를 비난할 이가 얼마나 되겠나. 그런데 자유한국당은 두번째 길을 고수한다.
황 대표는 국회 파행에 따른 민생 외면론에 “여당이 민생과 아무 관계가 없는 문제로 국회를 닫아놓고 이제 와서 민생 운운하는 것은 참 치졸하고 난센스”라고 했다. 난센스다. 국회법을 어기고 여야 4당이 추진한 선거법 등 패스트트랙을 육탄전으로 막고, 좌파독재라며 국회 밖으로 나간 건 자유한국당이다. 민생 지옥을 확인하고도 여전히 그 고통을 나 몰라라 한다. 보수적 외교·안보 전문가들조차 비판하는 강효상 의원의 한-미 정상 통화 내용 공개. 외교부의 강 의원 고발 방침에 나경원 원내대표는 “한마디로 국회 정상화를 못 하도록 대통령과 청와대가 기획한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강하게 든다”고 했다. 의심이 강하게 든다. 비판 여론을 물타기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대선 도전을 꿈꾸는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의 정치적 계산과 선명성 경쟁에 국회와 민생이 발목 잡힌 게 아닌가 하는. 민생 지옥은 대선 고지를 향한 정략의 액세서리, 선동구호가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강하게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엄중한 상황 진단에 견줘 그들의 대응이 너무 한가하다.
진정 민생 지옥을 해결하려면 남 탓 말고, 결단해야 한다. 그게 정치 지도자다. 민생 지옥을 외치지만 정작 국회는 천국을 향유한다. 55일째 일 안 하고 꼬박꼬박 세비를 받아간다. ‘민생 지옥, 국회 천국’을 ‘민생 천국, 국회 지옥’으로 바꿔야 한다. 당이 개최한 산불 피해 후속조치 대책회의에 차관들이 아무도 안 왔다며 분통 터뜨릴 게 아니라, 정부가 낸 ‘산불 추경안’을 심사하고 장차관을 예결위에 불러 질타하고, 필요한 예산을 반영해야 한다.
“자유한국당 의원 동지 여러분, 국회로 들어가 민생으로 싸우세요. 원외인 제가 장외에서 싸우겠습니다. 민생 지옥에 있는 국민을 생각해서 일 안 한 의원님들 세비부터 반납합시다. 그게 도리 아닙니까.” 황 대표가 이렇게 말한다면…. 박수가 쏟아질 것이다. 어차피 국회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명분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skshin@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