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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06 19:20 수정 : 2019.06.06 19:30

안영춘
논설위원

얼마 전 ‘기안84’라는 웹툰 작가의 <복학왕>이 농인(청각장애인) 비하 논란에 휩싸였다. 문제가 된 그림에는 한 농인의 말풍선들이 떠 있다. 하나는 발화고 다른 몇개는 독백이다. 그 농인은 수어가 아닌 독순법(입술 움직이는 모양을 보고 상대방 말을 알아내는 방법)과 음성언어로 의사소통을 하는데, 말풍선 안에 표기된 대사는 발화와 독백 둘 다 청인(비청각장애인)의 말소리와 ‘차이’가 있다. 그것이 장애인 비하라고 비판받자, 기안84는 모든 표기를 청인의 말소리로 대체했다.

기안84의 작품 세계를 아는 이들은 그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비하한 경우가 처음이 아니라고 했다. 블로그 같은 데에는 몇몇 사례도 제시됐다. 가만 보니 주로 맥락적인 문제였다. 그렇다면 농인의 발화와 독백을 청인의 말소리로 바꿔 표기했어도 문제가 해결된 것이라고 보긴 어렵다. 외려 작품 전반에 스며 있는 문제를 한층 비가시화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더구나 그 잘못은 기안84에게만 물어서도 안 된다. 애초 문제 제기부터가 말풍선의 ‘표기’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웹툰 작가 ‘기안84’의 <복학왕> 중 논란이 된 장면들. 전국장애인철폐연대 제공
사실, 문제의 그림은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을 것이 거의 확실한 질문들을 연쇄적으로 품고 있다. 통상 말풍선 안의 표기는 음성언어인가 문자언어인가. 문자로 쓰였으나 실상은 소리인 건가. 그럼 농인의 말풍선이 재현하는 것도 소리에 해당하나. 소리의 세계가 없는 농인에게는 추상에 가깝지 않을까.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를 읽을 수는 있는 청인의 그것과 비슷한 건 아닐까. 독백의 경우는 또 어떤가. 농인은 물론 청인도 들을 수 없는 독백을 어떻게 ‘표기’하는 것이 올바른가.

이 질문들은 시답잖아 보일지언정 답을 내놓는 것도 쉽지 않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청인은 농인이 감각하고 사유하고 재현하는 기전을 온전히 알 수 없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청인과 농인은 다른 언어 세계에 산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명제를 거칠게 끌어오면, 둘은 존재의 건축 양식이 전혀 다른 집에서 사는 셈이다. ‘박수’는 수어로 두 손을 들고 손목을 좌우로 돌려 표현한다. 소리가 아닌 ‘반짝이는’ 형상이다.(이길보라 감독, <반짝이는 박수 소리> 참조)

기안84의 표기는 평소 농인이 보는 ‘문자의 소리’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의미가 아예 형성되지 않거나, 이미 학습을 통해 ‘비하’로 이해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가 비판받아야 할 지점은 바로 거기다. 같은 이유로 나는 “말이 어눌하고 발음도 제대로 못하는 것은 물론 생각하는 부분에서도 발음이 어눌하고”라고 비하의 근거를 댄 어느 비판 성명서 한 대목이 걸린다. ‘농인의 말이 어눌하다’는 건 누구의 기준일까. ‘말은 어눌해도 생각은 또박또박하다’는 뜻이 숨어 있지는 않은가.

무의식으로라도 청인과 농인의 발음에 위계가 있다고 여기는 건 악의 없는 차별일 수 있다. (기안84의 비하에도 악의는 없었을 것이다.) 범죄자를 전라도 사투리 사용자로 설정하던 옛 드라마의 연출을 두고 ‘비록 사투리가 서울말보다 ‘어눌’하지만 비하와 차별, 혐오, 낙인의 도구로 쓰는 건 문제’라고 보는 것과 유사하다. 청인과 농인의 ‘차이’를 인정하려면 차이에 대해 가치 중립적이어야 하지만, 차이의 알맹이가 뭔지 알고자 하지 않으면 그조차 자의성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정치적 올바름’은 차이에 대한 윤리다. 하지만 차이에 대한 사유나 논의가 없으면, 정치는 멈추고 올바름의 ‘패션’만 남는다. 지금이 정치적 올바름의 시대임을 보여주는 우화는 차고 넘친다. 남성들에게 페미니즘 공부를 권한다면서 “나보다 잘 버는 사람을 배우자로 얻었으니, 진짜 승자는 나”라고 하는 남성의 우스개는 ‘중상주의 페미니즘’인가. ‘지갑은 열고 입은 다물라’가 어른의 규범이라는 중년 지식인의 장광설은 뭐라 불러야 좋을까. ‘짐승돌’을 극찬하다 별안간 ‘마초이즘’이라고 성토하는 평론가들의 시치미 떼기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변신인가.

차이의 윤리를 중시하는 시대에 이분법의 집단 독백이 만연하는 현상은 차이에 대한 정치의 부재를 드러낸다. 말풍선 속의 표기 몇 군데 바꾸게 하는 것으로 비하 문제가 간단히 해소될 리는 없다.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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