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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13 18:33 수정 : 2019.06.14 16:10

김영희

논설위원

“100년 전, 여성은 여러분들 앞에서 이처럼 이야기할 권리도 없었다. 65년 전, 내 딸이 직업을 갈망하는 걸 기대할 수 없었다. … 난 지금 이 나라를 바꿔달라는 게 아니다. 이 나라가 변화할 권리를 지켜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지난 주말 비행기 안에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대법관의 삶을 그린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을 보다가 울컥했다. 주한미국대사관 초청으로 방문한 워싱턴과 샌프란시스코에서 ‘성평등’을 주제로 미국 정부, 시민단체, 기업, 대학 관계자들을 두루 만나고 돌아오던 길이라 더 그랬는지 모르겠다. 긴즈버그는 하버드와 컬럼비아대 로스쿨을 수석으로 나오고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로펌 대신 교수직을 택해야 했다. 1970년대 여성만 가족의 간병인으로 인정하는 법으로 고통받는 남성의 변호를 맡아 법정에 선 이래, 그는 성별에 근거한 수백개의 법적 차별 조항을 하나씩 무너뜨리는 오랜 ‘투쟁’을 시작한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삶을 모티브로 한 <세상을 바꾼 변호인>의 한 장면.
반세기가 흘러, 미국은 역사상 여성이 가장 고학력인 시대를 맞고 있다. 긴즈버그가 1956년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할 때 동기생 중 여성은 단 2%였지만 2017년 정확히 50%가 됐다. 전통적으로 남성이 우위이던 이공계에 전국적으로 여성이 절반을 돌파한 것 또한 상징적인 일이다. 2016년 마지막 ‘금녀의 영역’이었던 전투직군을 개방한 미 국방부는 여군 비율을 높이려 적극적인 활동을 펴고 있다. 한국에서 ‘페미 영화’로 ‘폭격’당한 <캡틴 마블>은 펜타곤이 긴밀히 협력한 작품이다. 세계은행의 올해 보고서 ‘여성, 비즈니스 그리고 법’을 보면 전세계 평균 여성의 법적·경제적 권리는 아직 남성의 75%지만, 벨기에 등 6개국처럼 완전 평등을 이룬 곳도 2009년 이 조사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나타났다. 한국도 사정이 다르진 않다. 여성 대졸자는 2009년 남성 대졸자 수를 추월했다. 90년대 말 호주제 폐지 운동이 불붙을 때만 해도 나라가 망하기라도 할 듯 반발이 심했지만 이제 이를 되돌릴 수 있다고 여기는 이들은 없다. 이런 변화를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

위민스미디어센터의 줄리 버턴 대표(맨 오른쪽)와 동료들.
문제는 법적·제도적 차별 철폐나 여성 교육의 증대가 완전한 성평등으로 곧장 이어지진 않는다는 것이다. 전세계 여성 차별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160조달러(세계은행, 2018)라거나 조직 내 다양성이 높을수록 성과나 이윤도 좋다는 보고서는 수두룩하지만, 오래된 인식과 문화, 관행의 축적이 만들어낸 질서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기업의 ‘천국’이라는 미국에서 지난해 말 캘리포니아주가 최초로 여성이사할당제를 도입하는 등 ‘인위적’ 노력을 벌이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페이스북, 구글 등 캘리포니아에 본사를 둔 상장기업 450여곳은 연말까지 적어도 여성 임원 한 명을 둬야 하고 2021년까지 순차적으로 이 비율은 강화된다. 미디어 영역도 주목할 만하다. 2005년 제인 폰다, 글로리아 스타이넘 등이 창립한 위민스미디어센터는 각 분야 여성전문가 1500여명이 등록된 ‘쉬소스’(http://www.womensmediacenter.com/shesource/)를 구축해, 기자와 출판인, 제작자들에게 좀더 많은 여성들을 기사나 작품에 인용·출연시키도록 연결해준다. 줄리 버턴 대표는 “미디어는 그 사회의 문화의 형태를 결정한다. 여성의 목소리나 현실이 미디어에 과소반영될 때 여성은 중요하지 않은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강조했다.

UC버클리의 ‘여성기술이니셔티브’ 관련 전시 공간. 원하지 않는 접촉이 생기면 옷 속의 눈이 떠진다는 콘셉트상품이다.
성평등 논의는 이제 ‘미래’로 번지고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최근 ‘인공지능(AI)의 젠더 감수성’은 핫 이슈 중 하나다. 시장조사기관 가트너는 데이터와 알고리즘, 그리고 이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지닌 성별·인종별 편견 때문에 2022년까지 인공지능 프로젝트의 85%가 잘못된 결과를 내놓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인공지능이 현재의 임금격차나 편견을 더 강화할 것이란 ‘섬뜩한’ 예언인 셈이다. 유시버클리의 ‘여성 기술 이니셔티브’를 이끄는 질 핀레이슨은 “인공지능은 이미 만들어지는 단계라 처음부터 젠더 관점을 넣을 시간적 여유가 없다. 최소한 어떤 알고리즘이 사용되는지 투명성을 확보하고, 피드백이 지속적으로 가능한지, 어떻게 감시할지 등을 명시한 ‘인공지능 권리장전’ 논의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멋진 신세계’는 그냥 오지 않는다. 긴즈버그의 투쟁이 형태는 달리하지만 현재와 미래에도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국에 돌아온 며칠 뒤, 미국에서 ‘경단녀’ 출신 여성 보병사단장이 처음 탄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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