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7.18 18:15
수정 : 2019.07.23 16:45
백기철
논설위원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는 1930년대 영국 탄광 노동자들의 실상이 생생히 담겨 있다. 비스듬히 누워서 기듯 막장으로 들어가 몸을 제대로 펴지도 못한 채 작업하는 탄광 노동은 정말 고통스럽다. 오웰이 그린 이 참상은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조선인 노동자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영화 <군함도>는 1940년대 탄광에 징용된 조선인들의 고난을 그렸다. 일본인과의 전투 장면 등은 너무 많은 상상력 탓에 오히려 실상을 이해하기 어렵게 하는 측면이 있다. 군함도의 징용공들은 하루 12시간 이상 채굴에 동원됐고 질병·영양실조·익사 등으로 숨져갔다.
강제징용 조선인들은 탄광·제철소·조선소 등에서 혹독한 노동착취를 당하며 급여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외출도 통제된 채 구타와 감시 속에 위험한 일을 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1999년 이를 아이엘오 29호 협약을 위반한 강제노동으로 판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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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13년8개월만에 피해자들의 승소 판결이 난 2018년 10월30일 오후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회원들과 피해자들이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94)씨가 소감을 말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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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을 둘러싼 한-일 갈등이 격화하면서 ‘관제 민족주의’ 논란이 불거졌다. 문재인 정부가 시대에 뒤떨어진 민족주의 관점으로 접근해 나라 경제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죽창가, 의병 등 오해 살 만한 일이 없진 않지만 강제징용을 민족주의 관점으로만 보는 건 실제와 맞지 않다.
강제징용은 단적으로 말해 사람의 문제, 휴머니즘의 문제다. 보편적 인권의 문제란 얘기다. 이는 일본군 위안부가 한-일 간 민족적 문제가 아니라 인류 보편 가치의 문제인 것과 같다. 제국주의 군대에 짓밟힌 위안부는 휴머니즘에 입각한 여성·인권의 문제다. 강제징용 역시 제국주의 기업에 유린당한 조선인 노동자의 문제이기에 휴머니즘적 보편성을 갖는다.
국제인권법 시각에서 보면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짓밟힌 인권을 회복하고 배상하는 문제는 어떤 인위적 장치로도 제한할 수 없다. 한 나라의 법이나 정부 결정, 법원 판결, 나아가 나라 간 협정으로도 인간의 천부적 권리를 억제할 순 없다.
한국과 일본 법원은 판결로 이를 확인했다. 2007년 일본 최고재판소는 중국인 강제징용 피해자 판결에서 개인 청구권이 실체적으로 소멸되진 않았다고 했다. 1965년 한-일 협정으로 청구권 자금을 건네받은 우리의 경우는 좀 복잡하다. 하지만 2012년과 2018년 대법원은 한-일 협정으로 인해 개인 청구권이 원천적으로 제약될 수 없다고 판결함으로써 이 문제의 성격을 분명히 했다.
1965년 이후 시대 흐름이 많이 바뀌면서 과거 문제들이 휴머니즘적 관점에서 새롭게 제기됐음에도 두 나라 정부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위안부 합의의 파탄은 휴머니즘적 과거사 문제에 대해 두 나라 정부가 요령부득이란 걸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다.
노무현 정부는 2005년 한-일 협정 문서 공개를 계기로 강제징용 문제를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노력했다. 정부가 나서 위로금을 지급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2012년 포스코도 100억원을 출연하기로 했다. 노무현의 해법은 우리 힘으로 피해를 구제하려는 ‘정부 적극주의’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베 신조가 다름 아닌 과거사, 휴머니즘 문제에 경제 보복을 들이댄 건 치졸한 작태다. 문재인 대통령은 야인 시절 징용소송 변호인이었던 만큼 휴머니즘 원칙에 충실해 보인다. 다만, 이순신 발언 등은 민족주의에 기댄 것 아니냐는 오해를 살 수 있다.
아베의 노림수가 경제와 안보 차원에서 한국을 무릎 꿇리려 한다는 시각이 많지만 그럴수록 민족주의로는 대처하기 어렵다. 한-일 문제는 민족주의가 아니라 휴머니즘 관점에서 접근해야 도덕적 우위를 가지면서 올바른 해법에 다가갈 수 있다. 민족주의에 사로잡히면 감정 대결의 악순환만 계속될 뿐이다. 국내적으로도 반일, 친일 프레임으로 다투는 건 서로에게 상처만 내는 적전 분열이 되기 십상이다.
심각하고 위급한 외교 대결, 경제전쟁에서 휴머니즘이 무슨 소용이냐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휴머니즘이야말로 강력하다. 모든 힘의 원천은 휴머니즘, 즉 인간다움이다. 외교나 경제도 휴머니즘적 토대가 없으면 힘을 받지 못한다. 휴머니즘에 입각해 정도를 가는 건 당장의 해결에 급급하기보다 긴 안목으로 대처하는 것이고, 현실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유연하게 접근하는 걸 뜻한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일제 강점기의 ‘김용균’이고 ‘쌍용차 해고노동자’이고 ‘전태일’이다.
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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