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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7.30 17:32 수정 : 2019.07.30 19:01

‘아베 규탄 시민행동’이 27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연 ‘역사왜곡, 경제침략, 평화위협 아베정권 규탄 2차 촛불문화제’에 참가한 시민들이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 철회와 강제징용 사죄를 촉구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한국이 죽어도 일본을 못 따라잡는 18가지 이유>라는 고약한 제목의 책 초판이 발행된 것은 1997년 8월이었다. 한국 사정에 밝은 일본 종합상사맨 모모세 다다시가 쓴 이 책은 일본어판으로도 출간돼 두 나라에서 70만권 정도 팔려나갈 정도의 베스트셀러였다. 책 출간 직후의 외환위기 속에서 쌓인 한국인들의 울분과 자괴감이 책 판매에 한몫했을 성싶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3대 핵심 품목 수출규제와 ‘화이트리스트’ 배제 방침으로 불거진 격렬한 파장이 소재·부품을 중심으로 일본에 기대고 있는 한국 경제의 약한 구조를 아프게 일깨웠다. 1965년 국교정상화 뒤 계속 적자였다, 소재·부품업을 키우지 못했다, 대기업이 일본 업체와 거래하며 편하게만 장사한 탓이라는 식의 한탄이 여기에 덧붙는다.

한국의 제조업이 ‘조립 가공형’ 중심으로 커오면서 핵심 소재와 부품을 일본에 크게 기댄 것은 사실이나, 소재·부품업 육성을 버려뒀다는 식의 통설은 실상과 다르다. 유엔 무역통계 기준으로 소재·부품 수출시장에서 한국은 6위(2017년 기준)다. 국내총생산(GDP)으로 따진 한국 경제의 순위(2018년 11위)보다 높다. 한국과 일본의 격차도 줄었다. 한국의 소재·부품 수출은 2001년 564억달러로 일본의 32.2%에서 2010년 59.7%(2340억달러), 2017년 82.9%(2817억달러)로 높아졌다. 2010~2017년 일본이 뒷걸음질(-2.0%) 치는 동안 한국은 2.7% 늘린 결과였다. 부품보다 소재, 특히 반도체용 핵심 소재 쪽에서 약하다는 문제는 여전히 안고 있지만, 경제 전반의 성장과 더불어 소재·부품 분야도 커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소재·부품업이 화제에 오를 때마다 으레 등장하는 원·하청 관계의 문제도 다른 각도에서 볼 여지가 있다. 우선, 일본이라고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의 반도체 전문 기자 이즈미야 와타루가 2008년에 쓴 <전자재료 왕국 일본의 역습>에 이를 짐작하게 하는 일화가 등장한다. 하청인 소재·부품 쪽은 단가 후려치기와 접대 문화에 시달렸고, 미국의 반도체 업체들과 한국의 삼성전자가 그 틈을 치고 들어갔음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다.

삼성전자 같은 원청과 소재·부품 업체들의 관계 맺음이 국내에서도 일본에서처럼 형성될 수는 없었을까? 결론부터 말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소재·부품업의 특성 탓이다.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승부를 걸어야 하는 영역이라 대기업이 직접 하기에 알맞지 않고, 오랜 기간에 걸친 연구·개발(R&D)을 필요로 하는 분야라 어지간한 중소기업은 엄두를 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고품질의 소재·부품을 이미 개발해놓은 일본 업체들과 손을 잡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글로벌 공급망으로 얽힌 분업과 협업의 세계경제 체제에서 에이(A)부터 제트(Z)까지 모든 걸 아우르는 자기완결형 경제의 나라는 없다.

일본 아베 정부의 조처는 전세계에 걸친 이런 공급망에 심각한 균열을 일으키는 파괴 행위다. 이제 국내 대기업들로선 예전과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됐다. 한국과 일본 정부가 어느 시점에 타협해 사태를 봉합하더라도 기업들로선 언제든 다시 비슷한 사달이 날 수 있다는 전제로 대비를 해야 할 처지다. 국내 중소기업을 키우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상생의 생태계 조성이란 과제가 정부 차원의 추상적 구호에 머물지 않고 기업의 리스크 관리, 나아가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여길 수밖에 없도록 등을 떠미는 요인이다. 정부의 역할과 산학연 협업의 절실함도 덩달아 강해졌다.

모모세는 <…죽어도…>를 펴낸 이듬해엔 <한국이 ‘그래도’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는 18가지 이유>라는 정반대 제목의 책을 펴냈다. 모모세는 여기서 여러 문제점을 꼽으면서도 ‘한국은 희망이 있다’며 그 근거로 특유의 역동성과 잠재력을 들었다. 사실 앞서 낸 책도 자극적인 제목과 달리 한국을 깎아내리기보다는 ‘한국은 한국적인 제품을 내야 한다, 한국 기업들이 기술 투자에 인색하다, 제품의 질을 높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식의 애정 어린 충고 위주였다. 예기치 못한 악재가 ‘죽어도’를 넘어 ‘그래도’로 나아가는 실마리일 수 있다.

김영배
논설위원

kim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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