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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06 17:52 수정 : 2019.08.06 21:19

이완용. 한겨레 자료사진
이완용은 친러파였다. 1896년 아관파천의 핵심 주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그는 고종 부자가 러시아 공사관 깊숙이 몸을 옹그리고 있는 동안 친러 내각의 외무대신에 올랐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친러파였던 것은 아니다. 그전 한때는 친미파였고, 그보다 앞서 수구파이거나 개화파일 때도 있었다. 물론 그는 두말할 나위 없이 악랄한 친일파였고, 친일파로 산 시간이 가장 길었다. 그러나 ‘친일파’라는 단일 정체성으로만 파악하기에는 너무나도 변화무쌍한 팔색조의 생이었다.

이완용의 변신 논리는 한마디로 ‘힘’이었다. 그는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면서도, 힘을 좇는 데서만은 경이로운 일관성을 보였다. 친일파로 변신한 것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직후였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그가 애오라지 사리사욕에만 눈이 멀어 힘을 좇은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공과 사가 혼재하고 뒤로 갈수록 사가 공을 압도했지만, 그에게도 한때나마 나라와 임금, 백성을 위해 힘을 좇던 시절이 있었던 것까지 부인할 수는 없다.

내가 이완용을 주목하는 것은 그의 논리가 지금 한국 사회가 맞닥뜨린 사태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얼마 전 “의병이 나라 구했느냐”고 했다가 설화를 입고 프로그램에서 하차하면서 “난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울분을 토한 한 방송인의 내면세계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억울함이 엉터리없는 것만은 아니다. 일껏 나라 걱정해서 한 말인데 친일파로 몰렸다고 생각하면 누구든 “난 이완용이 아니야”라고 목놓아 외치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이유에서라면 이완용도 자신이 친일파로 불리는 것에, 좀 더 과장하면 이완용으로 불리는 것에도 억울해할지 모른다. 그가 철면피여서가 아니라, 힘의 논리가 모든 가치 규범에 우선한다고 볼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의 변신 목적은 사리사욕에만 있지 않았다. 다만 현실은 힘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라고 승인하고 나자 친미파가 친러파가 되고, 다시 친일파가 되는 건 수월했을뿐더러 지극히 일관성 있는 선택이었다.

이완용의 논리는 한국 사회의 지배규범으로 전승됐고, 일본의 ‘경제 도발’ 이후 일관성의 존재들이 집단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커밍아웃도 아니고 아우팅도 아니다. 그들을 ‘친일파’라고 하는 것부터가 너무 납작한 호명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애초 천의 얼굴을 가졌다. 그러고 보니, 저 많은 ‘반일파’는 그동안 어디에 다 있었는지도 궁금하다. 도전에 응전하는 순간, 반일파는 ‘힘’이라는 거울 사이로 친일파와 마주 선 존재가 된다.

사실 힘의 논리는 한국 사회에서 과잉되지 않은 적이 없다. 무한경쟁을 통해 실력에 따른 자원배분이 이뤄지는 것을 정의라고 보는 신자유주의적 태도에서도, 심지어 ‘쓰나미 밀려오는데 조개 줍고 있느냐’고 하는 촛불광장의 공리주의에서도 제1의 원리는 힘이었다. 문재인 정부 들어 힘의 논리가 어느 정도 주춤하는가 했더니, 외부 환경이 변하자 약자 보호 정책이 후퇴하는 징후도 덩달아 뚜렷해졌다.

이번 사태의 계기가 ‘위안부’ 피해자와 ‘징용’ 피해자 배상이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할 필요가 있다. 피해자들은 평생 이중의 국가폭력에 갇혀 살았다. 일제 때는 식민지배국 일본과 그 하위 주체인 ‘이완용’류가 이들을 겹으로 엮었다. 1965년 한-일 협정 때는 두 나라 모두 ‘투명인간’으로 취급했다. 당시 이들에 대해 한두름으로 셈을 치렀는지 아닌지가 지금 두 나라 사이의 핵심 쟁점이라는 게 피해 당사자로서는 얼마나 참혹한 노릇일까. 당시 국제사회 역학구조나 국가개발 필요성 따위 힘의 논리를 대는 것도 국가폭력이다.

한국 정부가 자국민에게 직접 폭력을 행사한 사례도 차고 넘친다. 사과도 하고 배상도 했지만, 인혁당 사건처럼 배상금을 과다하게 줬다며 도로 빼앗은 경우도 있다. 다시 촛불을 든 시민들은 이참에 한국 사회가 이완용과 완전히 결별하는 상상을 하면 어떨까. 아베 정부뿐 아니라 문재인 정부에도 요구해보자. 이제라도 모든 국가폭력 피해자에게 사과할 건 사과하고 배상할 건 배상하라고. 그것이 바로 일본을 앞서는 ‘극일’이라고.

안영춘
논설위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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