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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15 18:17 수정 : 2019.08.15 20:58

백기철
논설위원

2017년 7월20일 펜타곤에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전략회의가 열렸다. 트럼프의 한심한 대외 인식을 고쳐보려고 참모들이 준비한 회의였다. 매티스 국방, 틸러슨 국무, 므누신 재무 등이 군사력 배치부터 무역협정까지 전세계의 일을 설명했다. 미국 중심 질서, 자유무역의 혜택을 설파했지만 트럼프는 매번 고개를 가로젓거나 “헛소리”라고 했다.

회의는 이란과 한국 문제로 출렁였다. 틸러슨은 이란 핵협정 파기에 대해 “이란은 약속을 지키고 있습니다. 어떤 규정도 위반하지 않고 있어요”라고 했다. 그러자 트럼프는 “이란은 합의를 위반하고 있어. 당신들은 어떻게 (파기를) 선언할지 생각해내야 해”라고 소리쳤다. 중국의 환율조작국 지정도 마찬가지였다. 므누신이 중국은 몇년 전까지는 환율조작국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하자 “논리를 만드시오. 그냥 선언하란 말이오”라고 했다.

한국 문제는 단골 메뉴였다. 트럼프는 그날도 “한국에 군대를 주둔하는 데 35억달러를 쓰고 있어. 젠장 그걸 갖고 나와버려”라고 했다. 참모들은 한국이 거액의 분담금을 내고 있고,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항모 배치 등으로 돈이 열배는 더 들고, 미국이 한국에서 특별접근프로그램(SAP)을 운용함으로써 북한 미사일 탐지 시간을 알래스카의 15분에서 7초로 단축했다고 설명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워터게이트 특종을 한 밥 우드워드의 <공포>에 소개된 트럼프 집권 초반의 모습이다. 불행히도 트럼프의 가당찮은 고집은 대부분 현실이 됐다.

미국은 지난해 5월 이란 핵협정을 탈퇴했다. 2015년 미·영·프·중·러 등 안보리 상임이사국에다 독일까지 6개국이 이란과 맺은 협정을 트럼프는 헌신짝 팽개치듯 했다. 최근엔 미-중 대결 와중에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했다.

트럼프의 터무니없는 ‘동맹국 쥐어짜기’는 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한국에서 방위비 분담금 얻는 게 아파트 임대료 받는 것보다 쉬웠다”고 막말을 했다. 최근엔 볼턴을 보내 터무니없는 분담금 증액 요구를 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적보다 만만한 내 편을 더 못살게 구는 전형적인 ‘양아치’ 행태다.

트럼프가 김정은 위원장과 세차례 만나며 ‘평화 리얼리티쇼’를 연출하는 동안 세계는 더욱 혼미해졌고 위태로워졌다. 급기야 일본의 아베조차 트럼프를 따라 하는 형국이 됐다. 세계 도처에서 트럼프식 ‘안면몰수형 지도자’들이 활개친다. 세계가 미쳐 돌아가는 건 아닌지, 이러다 정말 ‘천하대란’이 일어나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이란 핵 합의 파기와 호르무즈해협의 긴장 고조는 남의 일이 아니다. 북한 핵 협상의 미래일 수 있다. 북핵 협상이 타결되기도 쉽지 않지만, 설사 타결된다 해도 이란의 전철을 밟지 말란 법이 없다. 트럼프라면 북핵 합의를 깨는 건 손바닥 뒤집듯 할 것 같다.

트럼프의 ‘원맨쇼’를 보고 있으면 한반도에서 트럼프에 의한 평화가 가능할지 근본적 회의가 든다. ‘트럼프의 평화’가 진짜 평화일까? 부동산업자 트럼프에 의해 평화의 물꼬가 트이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일어날까? 한반도 평화를 위한다는 이유로, 세계를 망나니처럼 휘젓는 트럼프의 재선을 바라야 할까? 요즘 같아선 걱정이 앞선다.

우리로선 그나마 찾아온 기회를 어떻게든 헤쳐나가야 한다. 강대국들이 보증한 이란 합의마저 한순간에 파기해버리는 트럼프에게만 의존해선 곤란하다. 동맹이라도 따질 건 따지고 분명히 할 건 분명히 해야 한다. 미국을 포함해 주변 4강이 결속하는 평화체제로 가야 한다. 일본과도 과거사 문제의 원칙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협력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김정은도 트럼프에게만 매달려선 어렵다는 걸 알아야 한다. 트럼프만 적당히 요리하면 된다는 식은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이미 파탄났다. 노심초사하는 남한 정부를 창피나 줘서는 평화로 가기 어렵다. 미국이 관건이지만 평화로 가는 길은 남한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안면몰수식 ‘깡패 지도자’들이 횡행하는 세계에선 만만하게 보이면 낭패하기 십상이다. 맞을 때 맞더라도 소리라도 질러야 한다. 양아치한테는 때로 몽둥이가 약인 경우도 있다. 마음 굳게 먹고 분연히 가야 한다.

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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