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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1.01 18:41 수정 : 2017.11.01 19:37

안영춘
디지털 부문장 겸 총괄기획 에디터

광화문 캠핑촌은 2016년 11월4일 입주했다. 작은 텐트들이 펼쳐지기 무섭게 경찰이 달려들었다. 경찰 손에 들려 나가는 텐트 안에서 사람들은 “여기 사람 있다”고 아우성쳤다. 텐트를 빼앗긴 이들은 늦가을 밤하늘을 이불 삼아 한뎃잠을 잤다. 다음날 2차 촛불집회가 열리면서 텐트는 다시 들어섰다. 계절이 두 번 바뀌고 마침내 박근혜가 탄핵되고 난 올 3월25일까지, 광장 한 귀퉁이에 텐트 60동이 굴딱지처럼 눌어붙어 있었다.

‘촌민’은 크게 두 부류였다. 시인 송경동, 사진작가 노순택같이 창작할 권리를 침해당한 블랙리스트 문화예술인과 기륭전자의 김소연·유흥희같이 일자리를 빼앗긴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그들은 추위뿐 아니라 차량의 소음과 진동, 매연과도 사투를 벌였다. 새벽에 용변 보러 먼 길을 떠나는 건 더 큰 곤욕이었다. 후배 기자가 호기롭게 그곳에서 하룻밤을 났는데, 이튿날 보니 얼굴 윤곽이 무너져 있었다. 촌민 가운데 드물게 해사한 이가 보이면, 하룻밤 ‘집잠’을 자고 온 경우였다.

그 겨울, 나는 그들 곁을 배회했다. 캠핑촌이 내다보이는 카페 창가를 찾아 기사를 썼고, 가끔 전화를 걸어 근처 막걸리 집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몇 번은 그들과 촛불집회에서 나눠줄 인쇄물을 이슥도록 만들기도 했다. 인쇄소에 파일을 넘기고 파김치가 되어 택시에 오른 뒤에도 텐트로 향하는 그들 모습이 어른거려 몸을 의자 깊이 묻을 수 없었다. 그들은 원주민, 나는 관광객 같았다. 시인 김수영의 표현을 빌리면,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었다.(‘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들도 원주민은 아니었다. 이미 2년 반 전부터 그곳에 자리 잡고 있던 세월호 피해 가족들에게 그들은 새로 전입한 이주민이었다. 세월호 피해 가족들은 단식을 하면서 ‘폭식 투쟁’에도 맞서야 했다. 아랫마을에 해당하는 지하보도에는 더 유서 깊은 장소가 있었다.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광화문공동행동’은 2012년 8월부터 그곳에서 농성을 이어왔다. 그들은 지난 9월5일에야 농성을 풀었다. 햇수로 옹근 5년, 날수로는 1842일 만이었다. 그사이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해 숨진 장애인 18분의 영정이 들어섰다.

촛불광장은 주말에 한 번씩 열리는 칠일장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그곳은 집이자 일터였고, 그들은 실존과 생존의 문제를 붙들고 주 7일을 무한 반복하며 그곳에서 버텼다. 사실 촛불광장은 2015년 11월 민중총궐기대회에서부터 싹트고 있었다. 그때 물대포를 맞은 백남기 농민은 유명을 달리했고, 2차 촛불집회는 그의 장례식이기도 했다. 민중대회를 이끈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은 아직 갇혀 있다. 이들은 촛불의 무임승차자가 아니라 직접 당사자다.

촛불 한 돌을 맞아 청와대 앞으로 행진하려는 계획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촛불 대통령’을 자처하는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나와 시민을 환대하는 상상은 적폐와 힘겹게 싸우는 대통령을 조직 이기주의를 앞세워 방해하지 말라는 주장 앞에서 머쓱해졌다. 촛불은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요청이라는 보편적인 해석은 정부가 차차 문제를 해결해줄 테니 참고 기다리라는 요구 앞에서 무색해졌다.

‘모두가 하나’라던 지난 촛불광장에서도 젠더를 차별하고 소수자를 비하하는 표현이 적잖이 문제가 되곤 했다. 그때마다 “해일 밀려오는데 조개 줍고 있냐?”는 대의론이 등장했다. 이 언설에 맞서 나온 반론은 “조개 밀려오는데 해일 줍고 있냐?”였다. 그런데 박근혜가 감옥에 가 있는 지금도 해일은 기세등등하다. 해일은 언제 소멸할까. 대의론 자체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해일은 아닐까. 그렇다면 조개는 언제쯤 주울 수 있을까.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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