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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1.12 18:22 수정 : 2017.11.12 19:02

박현
경제 에디터

경제 불안으로 뒤숭숭했던 1997년 설 직전에 한보철강 당진제철소 공사 현장 취재를 갔다. 그해 1월 한보철강의 부도로 길거리에 나앉은 노동자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막사에 전기마저 끊기자 몇몇 노동자들은 돼지우리를 개조해 마련한 임시거처에 머물며 쓴 소주로 설을 맞이하고 있었다. 자식 대학 학자금을 마련하고자 그곳에서 일했다는 한 노동자는 못 받은 월급 200만원을 손에 쥐기 전에는 고향에 갈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돈 처먹고 비리 저지르는 놈들은 모를 겁니다. 몇 놈의 비리가 수천수만 사람들의 눈에 피눈물을 짜내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재계 14위였던 한보그룹은 정·관계와 금융계에 로비자금을 뿌리며 대출받은 수조원의 돈으로 방만한 경영을 하다 부도를 냈다. 한보 사태는 재벌의 불투명한 경영 행태와 정경유착의 결과가 국가 경제에 끼치는 영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한보를 시작으로 삼미·진로·기아·해태·뉴코아·한라 등 30대 그룹 중 7개가 한 해에 무너졌다. 결국 우리나라는 그해 12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치욕적인 이행조건을 수용하고 구제금융을 받았다.

재벌의 전근대적 소유·지배구조가 위기를 초래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히면서 이를 개선하기 위한 조처들이 취해졌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재벌 개혁은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일부 재벌은 외형 위주에서 수익성 위주로 사업방식을 바꿔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긴 했으나,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재벌의 비중이 오히려 커진데다 불투명한 소유·지배구조가 온존하고 있는 탓이다.

경제력 집중 문제를 보자. 이것은 출하액 상위 100대 기업이 전체 출하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나타내는 ‘일반집중도’로 측정할 수 있는데, 이 지표는 1995년 40.4%에서 2013년 51%로 증가했다. ‘범 4대 재벌’의 자산은 국가 전체 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분의 1에 이른다. 기업 지배구조 개선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영미식 주주자본주의 모델의 이식을 시도했다. 독립적 사외이사를 이사회에 진입시켜 경영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이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사외이사는 대부분 오너의 우군으로 구성돼, 유명무실하다.

위기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오기 마련이다. 현재 재벌 경영권이 경영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3~4세로 넘어가는 국면에 있다. 이들은 기업가 정신 또는 경륜이 부족하거나 형제간 경영권 다툼에 몰입하는 경우가 많아 우려를 키우고 있다. 다시 재벌 개혁이 중요한 이유다.

우선 기업 내부의 감시체제를 강화해야 한다. 집중투표제, 우리사주조합 등을 활용해 소액주주와 근로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사외이사를 선임할 수 있도록 상법을 개정해야 한다. 두번째는 행정·사법당국 등 외부의 통제장치 강화다. 특히 사법당국의 역할이 중요하다. 삼성이 2008년 비자금 사건을 겪고도 다시 국정농단 사태에 연루된 것은 법 집행이 엄정하지 못한 데도 원인이 있다. 이건희 회장은 배임과 조세포탈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집행유예로 옥살이를 면했고, 곧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경영에 복귀했다. 해체한다던 전략기획실은 슬그머니 미래전략실로 부활해 과거의 행태를 반복했다. 솜방망이 처벌이 삼성으로 하여금 뭐든 자신들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격이다. 최근 미니 컨트롤타워(사업지원TF) 신설 등 움직임에서도 삼성이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었다는 신호를 읽기 어렵다.

최근 정부 일각에서 ‘혁신경제’ 목소리가 높아지며 개혁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나오고 있다. 재벌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대통령의 의지가 중요하다. 이번만큼은 재벌 개혁의 기회를 놓치지 않길 바란다.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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