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디터 때가 꼬질꼬질한 2017년 다이어리 수첩 첫 장을 펼쳤다. 마당 있는 단독주택 살기, 엘피(LP) 모으기, 봄 농사 배우기, 근육 키우기, 절임 음식 만들기, 어머니 자주 찾아뵙기, 아들과 쏘가리 낚기. 지난해 이맘때쯤 공들여 세운 새해 계획이 빼곡하다. 세밑이 되니 습관처럼 살핀다. 이룬 게 무엇인지. 언감생심, 마당 있는 단독주택은 애초부터 어려운 상상이었다. 올 한 해 집값이 뛰어 더욱 멀어졌다. 근육 키우기는 업무와 음주 탓에 시늉만 했다. 어머니는 자주 찾아뵙지도 못했고, 올 9월 소천하셨다. 가슴에 박힌 못이 됐다. 새삼스러울 게 없지만 올해 실적도 변변치 않다. 엘피 몇장 모았고, 마늘·쑥갓·매실 절임 등 장아찌 음식에 도전했다는 정도다. 그래도 지난해 이맘때와 견주면 마음은 한결 가볍다. 사회 분위기 덕이다. 광화문광장에서 촛불을 들며 조마조마했던 ‘박근혜 탄핵’, 이뤄질 수 없을 듯했던 상상은 헌법재판소의 탄핵소추안 인용으로 현실이 됐다. 지금은 ‘도로’ 자유한국당에 간 김무성, 김성태 등 탈당파 의원들이 힘을 보태 박근혜를 권좌에서 끌어내렸고, 정권교체를 이뤘다. 5월9일 장미대선 이후 묵은 적폐를 청산하고, 썩은 곳을 도려내는 일이 한창이다. 국가정보원과 기무사령부, 검찰 등 음험한 권력의 상징들조차 개혁을 부르짖는 광경을 목도한다. ‘파사현정’, <교수신문>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가 ‘그릇된 것을 깨뜨려 없애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것이니 개인적 다짐의 성과는 좀 부실해도 한 해를 웃으며 보낼 수 있다. 새해가 다가오니, 또 계획을 세운다. 엘피 모으기, 봄 농사 배우기, 근육 키우기는 그대로 옮겨 적고, 몇 가지 개인적 다짐을 추가했다. 그리고 지난해 박근혜 탄핵을 상상했듯, 몇 가지 사회·정치적 바람도 적었다. 일단 새해엔 더 보고 싶지 않은 게 있다. 고교 실습생, 선로 보수 비정규직, 고공 크레인과 공사현장 인부들의 죽음이다. 내년에도 비슷한 바람을 되뇔 수도 있다. 구조적 고질이라 더디게, 나아지는 듯 마는 듯 할 것이다. 꼭 보고 싶은 것들도 있다. 첫째, 북한의 평창겨울올림픽 참가다. 문재인 대통령이 나서 한-미 연합훈련 연기까지 열어뒀으니, 북한이 통 큰 결심을 해줬으면 좋겠다. 스키 좀 함께 탄다고 북한 핵·미사일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나 남북이 손잡고 웃고 즐기면서 상큼하게 한 해를 시작하고 싶다. 둘째, 특혜 없는 종교인 과세 실현이다. 어렵게 법을 만들었는데, 힘있는 자들이 또 비틀고 무력화한다. 신도들이 십일조 내고, 불전함에 정성을 담듯 종교인도 번 만큼 낼 때가 됐다. 셋째, 개헌이다. ‘87년 체제’를 바꿀 기회다. 대통령부터 여당·야당까지, 모두 개헌을 되뇌니 30년 만에 찾아온 천재일우다. 정치세력들의 주판알 튀기는 소리, 국회 의석 분포를 볼 때 3분의 2 개헌선을 넘기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상상한다. 성평등,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 등 기본권 강화, 자치입법권 확대, 권력구조 개편…. 우리 사회 전반을 바꿀 새 규범인 헌법개정안이 국민투표를 통과하는 그 순간을.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적은 것처럼 ‘새해들이 경계 표시용 도랑에 의해 다른 해들과 분리되지 않듯’, 12월31일과 1월1일은 눈 덮인 개울 하나 살짝 건너는 것과 같을 뿐이다. 좁은 개울 저편과 이편이 크게 다르지 않듯 해가 바뀐다고 별로 달라질 게 없는데, 사람들이 괜한 의미를 부여하고 다짐하고 뭔가를 기대한다. 그래도 모를 일이다. 올해 박근혜 파면과 정권교체가 현실이 됐듯, 개헌이 이뤄지고 87년 체제가 종식되는 한 해가 될지도. skshin@hani.co.kr
칼럼 |
[편집국에서] 새해, ‘상상은 현실이 된다’ / 신승근 |
정치에디터 때가 꼬질꼬질한 2017년 다이어리 수첩 첫 장을 펼쳤다. 마당 있는 단독주택 살기, 엘피(LP) 모으기, 봄 농사 배우기, 근육 키우기, 절임 음식 만들기, 어머니 자주 찾아뵙기, 아들과 쏘가리 낚기. 지난해 이맘때쯤 공들여 세운 새해 계획이 빼곡하다. 세밑이 되니 습관처럼 살핀다. 이룬 게 무엇인지. 언감생심, 마당 있는 단독주택은 애초부터 어려운 상상이었다. 올 한 해 집값이 뛰어 더욱 멀어졌다. 근육 키우기는 업무와 음주 탓에 시늉만 했다. 어머니는 자주 찾아뵙지도 못했고, 올 9월 소천하셨다. 가슴에 박힌 못이 됐다. 새삼스러울 게 없지만 올해 실적도 변변치 않다. 엘피 몇장 모았고, 마늘·쑥갓·매실 절임 등 장아찌 음식에 도전했다는 정도다. 그래도 지난해 이맘때와 견주면 마음은 한결 가볍다. 사회 분위기 덕이다. 광화문광장에서 촛불을 들며 조마조마했던 ‘박근혜 탄핵’, 이뤄질 수 없을 듯했던 상상은 헌법재판소의 탄핵소추안 인용으로 현실이 됐다. 지금은 ‘도로’ 자유한국당에 간 김무성, 김성태 등 탈당파 의원들이 힘을 보태 박근혜를 권좌에서 끌어내렸고, 정권교체를 이뤘다. 5월9일 장미대선 이후 묵은 적폐를 청산하고, 썩은 곳을 도려내는 일이 한창이다. 국가정보원과 기무사령부, 검찰 등 음험한 권력의 상징들조차 개혁을 부르짖는 광경을 목도한다. ‘파사현정’, <교수신문>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가 ‘그릇된 것을 깨뜨려 없애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것이니 개인적 다짐의 성과는 좀 부실해도 한 해를 웃으며 보낼 수 있다. 새해가 다가오니, 또 계획을 세운다. 엘피 모으기, 봄 농사 배우기, 근육 키우기는 그대로 옮겨 적고, 몇 가지 개인적 다짐을 추가했다. 그리고 지난해 박근혜 탄핵을 상상했듯, 몇 가지 사회·정치적 바람도 적었다. 일단 새해엔 더 보고 싶지 않은 게 있다. 고교 실습생, 선로 보수 비정규직, 고공 크레인과 공사현장 인부들의 죽음이다. 내년에도 비슷한 바람을 되뇔 수도 있다. 구조적 고질이라 더디게, 나아지는 듯 마는 듯 할 것이다. 꼭 보고 싶은 것들도 있다. 첫째, 북한의 평창겨울올림픽 참가다. 문재인 대통령이 나서 한-미 연합훈련 연기까지 열어뒀으니, 북한이 통 큰 결심을 해줬으면 좋겠다. 스키 좀 함께 탄다고 북한 핵·미사일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나 남북이 손잡고 웃고 즐기면서 상큼하게 한 해를 시작하고 싶다. 둘째, 특혜 없는 종교인 과세 실현이다. 어렵게 법을 만들었는데, 힘있는 자들이 또 비틀고 무력화한다. 신도들이 십일조 내고, 불전함에 정성을 담듯 종교인도 번 만큼 낼 때가 됐다. 셋째, 개헌이다. ‘87년 체제’를 바꿀 기회다. 대통령부터 여당·야당까지, 모두 개헌을 되뇌니 30년 만에 찾아온 천재일우다. 정치세력들의 주판알 튀기는 소리, 국회 의석 분포를 볼 때 3분의 2 개헌선을 넘기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상상한다. 성평등,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 등 기본권 강화, 자치입법권 확대, 권력구조 개편…. 우리 사회 전반을 바꿀 새 규범인 헌법개정안이 국민투표를 통과하는 그 순간을.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적은 것처럼 ‘새해들이 경계 표시용 도랑에 의해 다른 해들과 분리되지 않듯’, 12월31일과 1월1일은 눈 덮인 개울 하나 살짝 건너는 것과 같을 뿐이다. 좁은 개울 저편과 이편이 크게 다르지 않듯 해가 바뀐다고 별로 달라질 게 없는데, 사람들이 괜한 의미를 부여하고 다짐하고 뭔가를 기대한다. 그래도 모를 일이다. 올해 박근혜 파면과 정권교체가 현실이 됐듯, 개헌이 이뤄지고 87년 체제가 종식되는 한 해가 될지도.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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