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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1.07 18:14 수정 : 2018.01.07 18:59

박현
경제에디터

1948년 6월23일 국회 본회의장. 제헌헌법 제정을 위해 출범한 헌법기초위원회(위원장 서상일)가 헌법 초안을 의원들에게 배포했다. 서 위원장은 첫머리에 “헌법 내용에서 가장 중요하게 토론된 몇가지 말씀을 드리겠다”며, 국호 문제와 함께 “특권계급 일체를 부인하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우리들의 자손만대가 균등한 사회를 이루자는 그러한 권리·의무를 설정한 것이 중요한 골자이자 정신인 것을 이해해 주셔야 된다”며 “6장 경제 편에서 만민균등 경제원칙을 확연히 확립했다”고 말했다.

이어 헌법기초위 전문위원으로 참여해 초안을 잡은 유진오 서울대 교수가 나와, “불란서 혁명이라든가 미국이 독립시대로부터 민주주의의 근원이 되어온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과 권리를 위하고 존중하는 동시에 경제 균등을 실현해보려고 하는 것이 기본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실제로 그해 7월17일 공포된 제헌헌법 전문에는 이런 균등 정신이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라는 구절로 명기됐으며, 이는 현재 헌법에도 살아 있다. 제2장에서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는 파격적인 조항도 담았다. 이익균점권은 이익 공유뿐 아니라 노동자 경영참여 권리도 포함하는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균등 정신은 박정희 정권 들어 퇴색하고 말았다. 쿠데타 직후인 1962년 개헌 때 이익균점권 조항은 삭제됐고, 유신헌법에서는 재벌 중심 경제운용을 위해 노동권을 크게 후퇴시켰다. 87년 헌법에서 이른바 경제민주화 조항으로 불리는 119조가 만들어졌지만, 이익균점권을 부활시키지 못하는 등 제헌헌법 정신에 못 미쳤다.

헌법 경제 조항의 변천을 길게 소개한 이유는 일하는 시민들이 정당한 몫을 가져가는 시스템이 사실은 역사적 근거를 갖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헌법을 계승한 제헌헌법은 강력한 경제민주화 조항을 담고 있었으나 군사정권에 의해 왜곡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 사회는 경제적 균등 대신에 기업과 대주주, 경영진, 그리고 일부 대기업 정규직들에게 과도한 혜택이 돌아가는 불균등 사회가 되고 말았다.

문재인 정부가 매우 제한적인 부자 증세를 넘어 포괄적인 증세를 통해 복지를 대폭 확대하는 경로를 선택하기 어렵다면, 시장에서 노동자들에게 배분되는 몫을 확충하는 제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방식이 바로 이익배분제다. 주요 선진국에선 기업 자체 단위에서 이를 실시하고 있으며, 현재 삼성전자를 비롯한 국내 대기업 일부에서도 직원들을 대상으로 시행중이다. 하지만 대-중소기업 간 격차가 극심하고,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사실상 종속돼 있는 한국적 현실을 고려하면, 이를 중소 협력업체로 확대해야 한다. 현 정부도 ‘협력이익배분제’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으나 아직 구체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또 하나는 노동자 경영참여다. 독일 같은 경우에는 ‘노사공동결정제’가 도입돼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대기업 사주들의 불투명한 경영 행태가 만연한 우리나라엔 이런 제도가 더 필요하다. 현재 서울시에서 공공기관 중심으로 노동이사제를 시행하고 있는데, 이를 민간 기업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재계와 보수 진영에선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면서 강하게 반발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현대 자본주의가 노동 착취와 불평등 심화로 위기를 겪으면서도 지금까지 발전해온 것은 노동 기본권과 복지 확대를 통해 부작용들을 최소화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새로운 경제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지금, 현 정부 경제팀은 더 과단성 있는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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