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에디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의 약점은 매우 단순하다. 너무 못 만들었다는 것이다.’ 영화 담당을 하던 2003년 가을 나는 이렇게 적힌 원고를 받아들고 망연자실했다. 돌직구도 이 정도면 부상을 넘어 즉사가 아닐까. “이거 어떡해야 돼요?” 옆자리의 선배한테 물었더니 선배는 피식피식 웃으며 답했다. “뭘 어떡해, 그냥 실어야지.” 감독 데뷔작 <키드캅>의 실패 이후 제작만 하던 이준익 씨네월드 대표가 10년 만에 다시 감독에 나선 <황산벌>에 대한 정성일 평론가의 평론 중 한줄이었다. 정 평론가 특유의 스타일이 배어 있는 글이었지만 막상 내 이야기가 되면 스타일로만 봐줄 수 없는 게 인지상정. 그다음 만난 이준익 감독은 역시나 인색한 평에 대해서 하소연했다. 하지만 웃으면서 농반진반의 푸념을 하는 그에게서 분노나 상처 같은 게 크게 보이지는 않아 안도했다. 그런 그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선배도 원고를 보고 피식 웃으며 별 고민을 안 했던 것 같다. 이 독한 멘트에 자극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차기작 <왕의 남자>로 이준익 감독은 장외 홈런을 쳤다. 십년 넘게 영화를 만들면서 졌다는 수십억 빚 청산뿐 아니라 각종 상까지 싹쓸이하며 충무로의 거물로 치솟았다. 그런데 후속작들에서 흥행력이 점차 떨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2011년 <평양성>의 시원찮은 결과 앞에서 이준익은 ‘상업영화’ 감독 은퇴를 선언했다. 물론 트위터에 올린 그의 은퇴선언은 비장하지 않았다. <평양성> 개봉 전 손익분기점을 못 맞추면 은퇴하겠다는 ‘말실수’ 같은 약속을 (아마도 할 수 없이) 지켰을 뿐이다. 그랬기에 얼마 뒤 복귀 소식이 들려도 놀랍지 않았다. 놀랍게 느껴지는 건 그 이후 그의 행보다. 아동 성폭행 문제를 응시한 <소원>부터 <사도>, <동주>, <박열>까지 제목이 두 글자라는 것 말고는 별 공통점이 없는 영화들을 부지런히도 만들어냈다. <사도> 정도를 제외하고는 이전의 필모그래피를 떠올리기 힘든 작품들이다. <소원>, <동주>, <박열>은 치솟은 한국영화 평균 제작비에 못 미치는 제작비로 완성했다. 특히나 흑백으로 찍은 <동주>는 스타 유아인의 적극적 출연 제의를, 제작비 5억원에 걸맞은 ‘사이즈’의 완성도를 위해 이준익 감독이 거절한 일화로 유명하다. 복귀 뒤 모든 작품들은 여유 있게 제작비를 회수했다. 물론 상품이자 예술인 영화를 단지 수익의 관점에서만 볼 수는 없다. 그의 복귀작들이 모두 엄청난 걸작인가 하면 그건 아닌 거 같다. 그는 한 장면의 완성도를 위해 밤을 새우는 완벽주의자가 아님을 터놓고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수익률 계산에 집중하는 영화인가 하면 그건 더더욱 아니다. 소재도 스타일도 비슷비슷해 안 봐도 본 것 같은 기획영화들이 넘쳐나는 충무로에서 그의 영화들은 대체로 난데없다. 유행을 좇지 않고, 완벽을 추구하지도 않으며, 화려한 볼거리도 별로 없다. 한마디로 영화적 ‘야심’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흥행의 야심이건, 작품성의 야심이건 야심 빼면 별것 없는데다, 대체로 그 야심에 도달하지 못하는 영화들이 대부분인 영화판에서 야심 없이 성실한 영화를 보는 건 오히려 진귀한 경험이다. 개봉을 앞둔 <변산>을 보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정성일 평론가는 이 영화를 보고 어떤 멘트를 할까? 좋은 이야기를 듣기는 쉽지 않을 거 같다. 너무 느슨하게 만든 거 아냐? 생각이 들면서도 영화 내내 킬킬, 피식피식 웃음이 멈춰지지 않았다. 야심 좀 없이 살면 어떠냐고, 환갑을 앞둔 성공한 예술가에게서 좀처럼 듣기 힘든 위로나 격려처럼 느껴진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꼰대스럽지 않은 아재의 별것 아닌 이야기를 듣고 싶다. dmsgud@hani.co.kr
칼럼 |
[편집국에서] 야심 없이 아름다운 / 김은형 |
문화스포츠 에디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의 약점은 매우 단순하다. 너무 못 만들었다는 것이다.’ 영화 담당을 하던 2003년 가을 나는 이렇게 적힌 원고를 받아들고 망연자실했다. 돌직구도 이 정도면 부상을 넘어 즉사가 아닐까. “이거 어떡해야 돼요?” 옆자리의 선배한테 물었더니 선배는 피식피식 웃으며 답했다. “뭘 어떡해, 그냥 실어야지.” 감독 데뷔작 <키드캅>의 실패 이후 제작만 하던 이준익 씨네월드 대표가 10년 만에 다시 감독에 나선 <황산벌>에 대한 정성일 평론가의 평론 중 한줄이었다. 정 평론가 특유의 스타일이 배어 있는 글이었지만 막상 내 이야기가 되면 스타일로만 봐줄 수 없는 게 인지상정. 그다음 만난 이준익 감독은 역시나 인색한 평에 대해서 하소연했다. 하지만 웃으면서 농반진반의 푸념을 하는 그에게서 분노나 상처 같은 게 크게 보이지는 않아 안도했다. 그런 그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선배도 원고를 보고 피식 웃으며 별 고민을 안 했던 것 같다. 이 독한 멘트에 자극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차기작 <왕의 남자>로 이준익 감독은 장외 홈런을 쳤다. 십년 넘게 영화를 만들면서 졌다는 수십억 빚 청산뿐 아니라 각종 상까지 싹쓸이하며 충무로의 거물로 치솟았다. 그런데 후속작들에서 흥행력이 점차 떨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2011년 <평양성>의 시원찮은 결과 앞에서 이준익은 ‘상업영화’ 감독 은퇴를 선언했다. 물론 트위터에 올린 그의 은퇴선언은 비장하지 않았다. <평양성> 개봉 전 손익분기점을 못 맞추면 은퇴하겠다는 ‘말실수’ 같은 약속을 (아마도 할 수 없이) 지켰을 뿐이다. 그랬기에 얼마 뒤 복귀 소식이 들려도 놀랍지 않았다. 놀랍게 느껴지는 건 그 이후 그의 행보다. 아동 성폭행 문제를 응시한 <소원>부터 <사도>, <동주>, <박열>까지 제목이 두 글자라는 것 말고는 별 공통점이 없는 영화들을 부지런히도 만들어냈다. <사도> 정도를 제외하고는 이전의 필모그래피를 떠올리기 힘든 작품들이다. <소원>, <동주>, <박열>은 치솟은 한국영화 평균 제작비에 못 미치는 제작비로 완성했다. 특히나 흑백으로 찍은 <동주>는 스타 유아인의 적극적 출연 제의를, 제작비 5억원에 걸맞은 ‘사이즈’의 완성도를 위해 이준익 감독이 거절한 일화로 유명하다. 복귀 뒤 모든 작품들은 여유 있게 제작비를 회수했다. 물론 상품이자 예술인 영화를 단지 수익의 관점에서만 볼 수는 없다. 그의 복귀작들이 모두 엄청난 걸작인가 하면 그건 아닌 거 같다. 그는 한 장면의 완성도를 위해 밤을 새우는 완벽주의자가 아님을 터놓고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수익률 계산에 집중하는 영화인가 하면 그건 더더욱 아니다. 소재도 스타일도 비슷비슷해 안 봐도 본 것 같은 기획영화들이 넘쳐나는 충무로에서 그의 영화들은 대체로 난데없다. 유행을 좇지 않고, 완벽을 추구하지도 않으며, 화려한 볼거리도 별로 없다. 한마디로 영화적 ‘야심’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흥행의 야심이건, 작품성의 야심이건 야심 빼면 별것 없는데다, 대체로 그 야심에 도달하지 못하는 영화들이 대부분인 영화판에서 야심 없이 성실한 영화를 보는 건 오히려 진귀한 경험이다. 개봉을 앞둔 <변산>을 보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정성일 평론가는 이 영화를 보고 어떤 멘트를 할까? 좋은 이야기를 듣기는 쉽지 않을 거 같다. 너무 느슨하게 만든 거 아냐? 생각이 들면서도 영화 내내 킬킬, 피식피식 웃음이 멈춰지지 않았다. 야심 좀 없이 살면 어떠냐고, 환갑을 앞둔 성공한 예술가에게서 좀처럼 듣기 힘든 위로나 격려처럼 느껴진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꼰대스럽지 않은 아재의 별것 아닌 이야기를 듣고 싶다.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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