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디터 폭풍 같은 한 주를 보내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유서를 다시 찬찬히 읽어본다. 428자의 유서엔 줄줄이 후회와 자책, 한숨이 녹아 있는 듯하다. “무엇보다 어렵게 여기까지 온 당의 앞길에 큰 누를 끼쳤다.” 진보정치에 일생을 바쳐온 그가 이 문장을 쓸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그가 마지막까지 걱정한 것은 결국 진보정치와 진보정당의 미래였다. 지지율 10% 안팎의 현재 정의당이 있기까지 험난한 진보정당 운동 30년이 있었다. 그리고 고단한 여정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진보정당은 한국 정치의 ‘필수 요소’인 돈과 조직 가운데 뭐 하나 가진 게 없다. 노 의원은 지난 2012년 진보정의당 공동대표 수락 연설에서 6411번 버스 첫차를 타고 서울 강남의 일터로 향하는 청소노동자들을 언급하며, 이들 ‘투명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정당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진보정당이 함께하고자 하는 이들은 삶의 무게에 치여 ‘조직화’되기 어렵다. 이른 새벽 노동을 위해 “9시 뉴스도 보지 못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많은 이들에게 정치는 남의 일이거나 다른 세상의 일일 것이다. 노회찬을 위시한 정치인도, 당도 언제나 부족한 자금에 쩔쩔맸다. 지난 6·13 지방선거 직후 열린 정의당 회의의 주요 주제는 ‘유동성 위기 해결 방안’이었다고 한다. ‘투명인간’을 대변하려는 정의당이지만, 막상 국회 안에선 ‘투명정당’으로 취급받기 일쑤였다. 2004년 민주노동당이 정당 지지율 13%를 얻으며 처음 원내에 진출한 이래, 진보정당은 교섭단체(의석수 20석 이상)가 아니라는 이유로 국회의 주된 의사결정에서 소외됐다. 지난 4월 민주평화당과 ‘평화와 정의의 의원모임’을 구성하며 진보정당 역사상 첫 원내교섭단체가 된 뒤, 노회찬 원내대표는 국회의장-교섭단체 원내대표단 주례회동 참석을 앞두고 “14년 전 국회에 처음 등원했는데, 오늘 그때만큼 떨린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진보정당은 이른바 민주개혁 세력에도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진보정당은 선거 때마다 ‘사표론’의 최대 피해자였다. 지난해 대선에서 심상정 후보는 선거 기간 내내 “정말 완주할 거냐”는 질문에 시달렸다. 평시엔 ‘2중대’ 오해를 받고, 선거 땐 존재 자체가 ‘분열’이라며 배척되어왔다. 그 와중에도 진보정당은 느리지만 꾸준히 한발 앞서 변화의 씨앗을 뿌려왔다. ‘금배지 특권’의 상징이던 국회의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없앤 것도, 상가임대차보호법과 이자제한법 등의 민생법안을 처음 만든 것도, 아이들에게 친환경 무상급식을 주자고 가장 먼저 제안한 것도 모두 진보정당이다. 노 의원의 마지막 발의 법안은 의원 대부분이 반기지 않는 ‘국회의원 특별활동비 폐지 법안’이었다. 진보정당의 성장과 발전은 기성 정치권에 자극을 줬고, 변화를 견인했다. ‘왜 진보정당이 필요한가’라는 물음에 최석 정의당 대변인은 이렇게 답했다. “정권은 그동안 계속 바뀌어왔다. 하지만 바뀌지 않은 것은 국민들의 고된 삶이다. 노동자와 서민을 대변하는 것이 당의 존재 이유인 정당은 진보정당뿐이다.” 노 의원을 향한 추모 열기는 그가 평생 일궈온 진보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호응이다. ‘노회찬 없는 정의당’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들이 많지만, 노회찬이 없어도 진보정치가 설 수 있도록 불합리한 선거제도 개혁, 차별적인 정치자금법 개정 등이 뒤따라야 한다. 그것이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라”는 노 의원의 마지막 당부를 받아안는 길일 것이다. idun@hani.co.kr
칼럼 |
[편집국에서] 428자 유서를 다시 읽으며 / 최혜정 |
정치에디터 폭풍 같은 한 주를 보내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유서를 다시 찬찬히 읽어본다. 428자의 유서엔 줄줄이 후회와 자책, 한숨이 녹아 있는 듯하다. “무엇보다 어렵게 여기까지 온 당의 앞길에 큰 누를 끼쳤다.” 진보정치에 일생을 바쳐온 그가 이 문장을 쓸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그가 마지막까지 걱정한 것은 결국 진보정치와 진보정당의 미래였다. 지지율 10% 안팎의 현재 정의당이 있기까지 험난한 진보정당 운동 30년이 있었다. 그리고 고단한 여정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진보정당은 한국 정치의 ‘필수 요소’인 돈과 조직 가운데 뭐 하나 가진 게 없다. 노 의원은 지난 2012년 진보정의당 공동대표 수락 연설에서 6411번 버스 첫차를 타고 서울 강남의 일터로 향하는 청소노동자들을 언급하며, 이들 ‘투명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정당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진보정당이 함께하고자 하는 이들은 삶의 무게에 치여 ‘조직화’되기 어렵다. 이른 새벽 노동을 위해 “9시 뉴스도 보지 못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많은 이들에게 정치는 남의 일이거나 다른 세상의 일일 것이다. 노회찬을 위시한 정치인도, 당도 언제나 부족한 자금에 쩔쩔맸다. 지난 6·13 지방선거 직후 열린 정의당 회의의 주요 주제는 ‘유동성 위기 해결 방안’이었다고 한다. ‘투명인간’을 대변하려는 정의당이지만, 막상 국회 안에선 ‘투명정당’으로 취급받기 일쑤였다. 2004년 민주노동당이 정당 지지율 13%를 얻으며 처음 원내에 진출한 이래, 진보정당은 교섭단체(의석수 20석 이상)가 아니라는 이유로 국회의 주된 의사결정에서 소외됐다. 지난 4월 민주평화당과 ‘평화와 정의의 의원모임’을 구성하며 진보정당 역사상 첫 원내교섭단체가 된 뒤, 노회찬 원내대표는 국회의장-교섭단체 원내대표단 주례회동 참석을 앞두고 “14년 전 국회에 처음 등원했는데, 오늘 그때만큼 떨린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진보정당은 이른바 민주개혁 세력에도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진보정당은 선거 때마다 ‘사표론’의 최대 피해자였다. 지난해 대선에서 심상정 후보는 선거 기간 내내 “정말 완주할 거냐”는 질문에 시달렸다. 평시엔 ‘2중대’ 오해를 받고, 선거 땐 존재 자체가 ‘분열’이라며 배척되어왔다. 그 와중에도 진보정당은 느리지만 꾸준히 한발 앞서 변화의 씨앗을 뿌려왔다. ‘금배지 특권’의 상징이던 국회의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없앤 것도, 상가임대차보호법과 이자제한법 등의 민생법안을 처음 만든 것도, 아이들에게 친환경 무상급식을 주자고 가장 먼저 제안한 것도 모두 진보정당이다. 노 의원의 마지막 발의 법안은 의원 대부분이 반기지 않는 ‘국회의원 특별활동비 폐지 법안’이었다. 진보정당의 성장과 발전은 기성 정치권에 자극을 줬고, 변화를 견인했다. ‘왜 진보정당이 필요한가’라는 물음에 최석 정의당 대변인은 이렇게 답했다. “정권은 그동안 계속 바뀌어왔다. 하지만 바뀌지 않은 것은 국민들의 고된 삶이다. 노동자와 서민을 대변하는 것이 당의 존재 이유인 정당은 진보정당뿐이다.” 노 의원을 향한 추모 열기는 그가 평생 일궈온 진보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호응이다. ‘노회찬 없는 정의당’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들이 많지만, 노회찬이 없어도 진보정치가 설 수 있도록 불합리한 선거제도 개혁, 차별적인 정치자금법 개정 등이 뒤따라야 한다. 그것이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라”는 노 의원의 마지막 당부를 받아안는 길일 것이다. id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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