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에디터 유럽 기차들은 국경을 알지 못한다. 도시와 도시를 연결할 뿐이다. 기차 앞머리에도, 역 시간표에도 도시 이름만 보인다. 어느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가는지에는 무심하다. 국경은 초현실적 존재다. 인공위성이 찍어주는 좌표로만 존재하는 상상의 선 같다. 경계라면 으레 철조망과 총구를 떠올리는 나라에서 온 사람한테는 이상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우습게도 국경 통과를 알려주는 것은 악착같은 한국 통신업체들이다. 음성 통화 요금 얼마, 데이터 요금 얼마라고 어김없이 휴대폰에 띄워준다. 국경선이 요철처럼 삐쭉빼쭉한 곳에서는 숫자가 바뀌었다가 금세 이전 요금으로 돌아온다. 국가들이 존재를 시작한 이래 그 경계를 이리도 무력하게 만든 약속의 이름은 솅겐조약이다. 솅겐은 독일, 프랑스와 경계 지역인 룩셈부르크의 지명이다. 조약 이름치고 이렇게 미미한 지명은 다른 데서는 찾기 어렵다. 5개국이 1985년에 이 시골 마을 앞을 흐르는 모젤강에 배를 띄우고 조약에 서명했다. 작은 기념관 하나만 증거로 남았다. 경계를 알리는 표지도 찾기 어려운 평범하고 평화로운 모습이야말로 인류에게 큰 불행을 강제해온 선인 국경의 철폐를 기념하기에 제격이다. 없어짐을 증명하는 것은 없음 자체인데 구태여 거창한 무엇이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영원히 빛날 것 같던 이름 솅겐조약은 문제의 근원으로 치부되기 시작하더니 생명이 위태해지고 있다. 지금처럼 심각한 회의론과 충돌하기 전까지 수십년간 진행된 유럽 통합을 간단히 표현하면 돈과 땅이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런데 남유럽 재정 위기로 유로가 오명을 쓰더니 국경을 다시 세우자는 주장으로까지 사태가 흘러왔다. 일부 국경지대에서 검문검색 재개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금은 초소와 경찰뿐이지만 언젠가 철조망과 군대가 배치될지 모른다. 마테오 살비니 이탈리아 내무장관은 며칠 전 “유로와 솅겐? 죽음 말고 되돌리지 못할 것은 없다”고 했다. 난민이라며 무단 입국하는 이들과 시민권 없는 집시들이 표적이다. 일자리와 치안 걱정, 문화·종교적 이질감을 이유로 한 민중적 차원의 거부가 그에게 힘을 줬다. 반대자들은 살비니를 파시스트의 후계자라고 욕한다. 유럽 주요국이 지금 파시즘에 빠진다고 하면 과장일 것이다. 그러나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제거 열망이 파시즘의 전조들 중 하나임은 많은 이가 수긍하는 바다. 역사란 피범벅과 땀범벅의 기록이랄 수도 있지만, 유럽인들이 관통해온 시간들이야말로 처절했다. 유럽인들과 특히 그 지배자들이 유럽대륙 안팎에 끼친 죄악은 크다. 그 땅은 끔찍한 노예제, 인종주의, 제국주의, 총력전의 본산이자 수출 기지였다. 가장 밑바닥까지 간 그들은 다시는 지옥을 겪고 싶지 않아 초국가 체제를 발명해냈다. 빅토르 위고 등 일부 지식인이 얘기한 몽상의 현실화다. 역사의 종착역은 국민국가가 아닐 수 있음을 증명한 사건이다. 선구자는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유럽의 통합 수준에 한참 미치지 못하지만 동남아시아국가연합 등이 유럽연합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도 그렇다. 따지고 보면, 지금은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민주주의, 공화주의, 법치주의도 유럽인들이 오랜 압제와 고통스러운 시행착오 끝에 재발견하고 길어올린 이념들이다. 유럽 통합도 인류의 상상력의 한계를 끌어올린 것이다. 그러니 유럽의 좌절은 인류의 좌절일 수 있다. 화해와 통합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말살, 파괴, 눈물, 원한, 비탄, 반성, 타협, 용서, 설득, 양보, 결단이 필요했다. 그것을 허무는 데는 타자들에 대한 혐오 하나면 족하다. ebon@hani.co.kr
칼럼 |
[편집국에서] 유럽을 슬퍼해야 하는 이유 / 이본영 |
국제에디터 유럽 기차들은 국경을 알지 못한다. 도시와 도시를 연결할 뿐이다. 기차 앞머리에도, 역 시간표에도 도시 이름만 보인다. 어느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가는지에는 무심하다. 국경은 초현실적 존재다. 인공위성이 찍어주는 좌표로만 존재하는 상상의 선 같다. 경계라면 으레 철조망과 총구를 떠올리는 나라에서 온 사람한테는 이상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우습게도 국경 통과를 알려주는 것은 악착같은 한국 통신업체들이다. 음성 통화 요금 얼마, 데이터 요금 얼마라고 어김없이 휴대폰에 띄워준다. 국경선이 요철처럼 삐쭉빼쭉한 곳에서는 숫자가 바뀌었다가 금세 이전 요금으로 돌아온다. 국가들이 존재를 시작한 이래 그 경계를 이리도 무력하게 만든 약속의 이름은 솅겐조약이다. 솅겐은 독일, 프랑스와 경계 지역인 룩셈부르크의 지명이다. 조약 이름치고 이렇게 미미한 지명은 다른 데서는 찾기 어렵다. 5개국이 1985년에 이 시골 마을 앞을 흐르는 모젤강에 배를 띄우고 조약에 서명했다. 작은 기념관 하나만 증거로 남았다. 경계를 알리는 표지도 찾기 어려운 평범하고 평화로운 모습이야말로 인류에게 큰 불행을 강제해온 선인 국경의 철폐를 기념하기에 제격이다. 없어짐을 증명하는 것은 없음 자체인데 구태여 거창한 무엇이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영원히 빛날 것 같던 이름 솅겐조약은 문제의 근원으로 치부되기 시작하더니 생명이 위태해지고 있다. 지금처럼 심각한 회의론과 충돌하기 전까지 수십년간 진행된 유럽 통합을 간단히 표현하면 돈과 땅이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런데 남유럽 재정 위기로 유로가 오명을 쓰더니 국경을 다시 세우자는 주장으로까지 사태가 흘러왔다. 일부 국경지대에서 검문검색 재개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금은 초소와 경찰뿐이지만 언젠가 철조망과 군대가 배치될지 모른다. 마테오 살비니 이탈리아 내무장관은 며칠 전 “유로와 솅겐? 죽음 말고 되돌리지 못할 것은 없다”고 했다. 난민이라며 무단 입국하는 이들과 시민권 없는 집시들이 표적이다. 일자리와 치안 걱정, 문화·종교적 이질감을 이유로 한 민중적 차원의 거부가 그에게 힘을 줬다. 반대자들은 살비니를 파시스트의 후계자라고 욕한다. 유럽 주요국이 지금 파시즘에 빠진다고 하면 과장일 것이다. 그러나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제거 열망이 파시즘의 전조들 중 하나임은 많은 이가 수긍하는 바다. 역사란 피범벅과 땀범벅의 기록이랄 수도 있지만, 유럽인들이 관통해온 시간들이야말로 처절했다. 유럽인들과 특히 그 지배자들이 유럽대륙 안팎에 끼친 죄악은 크다. 그 땅은 끔찍한 노예제, 인종주의, 제국주의, 총력전의 본산이자 수출 기지였다. 가장 밑바닥까지 간 그들은 다시는 지옥을 겪고 싶지 않아 초국가 체제를 발명해냈다. 빅토르 위고 등 일부 지식인이 얘기한 몽상의 현실화다. 역사의 종착역은 국민국가가 아닐 수 있음을 증명한 사건이다. 선구자는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유럽의 통합 수준에 한참 미치지 못하지만 동남아시아국가연합 등이 유럽연합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도 그렇다. 따지고 보면, 지금은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민주주의, 공화주의, 법치주의도 유럽인들이 오랜 압제와 고통스러운 시행착오 끝에 재발견하고 길어올린 이념들이다. 유럽 통합도 인류의 상상력의 한계를 끌어올린 것이다. 그러니 유럽의 좌절은 인류의 좌절일 수 있다. 화해와 통합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말살, 파괴, 눈물, 원한, 비탄, 반성, 타협, 용서, 설득, 양보, 결단이 필요했다. 그것을 허무는 데는 타자들에 대한 혐오 하나면 족하다.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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